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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와 일본 자본 도입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1편 - 14

by 한정엽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는 단순한 외교적 사건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자 경제 발전의 전환점이었다.


해방 이후 20년간 지속된 양국 간의 냉각된 관계는 냉전 체제 하에서의 동북아시아 지정학적 변화와 한국의 경제 개발 의지가 맞물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라는 야심 찬 목표 아래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확보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극심한 자본 부족과 기술적 낙후성에 시달리고 있었다.


절대빈곤 상황에서 자력 근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반면 일본은 1960년대 들어 고도경제성장을 구가하며 자본과 기술의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 양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동아시아 전략 또한 한일관계 정상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외부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핵개발과 베트남 전쟁의 확산으로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반공 동맹의 핵심축으로 묶어내려 했다.


이는 한일 양국 모두에게 관계 정상화의 외교적 동력을 제공했다.


경제적 동기와 계산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구상은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없이는 실현 불가능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서는 대규모 외자 도입이 필수적이었으며, 지리적 근접성과 기술적 적합성을 고려할 때 일본은 가장 현실적인 협력 파트너였다.


특히 일본의 중화학공업 기술과 자본재는 한국의 산업화 전략에 핵심적인 요소였다.


일본 역시 경제적 실익을 추구했다.


1960년대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은 새로운 시장과 원료 공급지, 그리고 생산 기지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한국은 풍부한 노동력과 잠재적 소비시장을 제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었다. 또한 한국과의 경제 협력은 일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도 할 수 있었다.


양국의 경제적 필요가 일치하면서 정치적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이 생겨났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상처와 독도 영유권 문제, 재일교포 처우 문제 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지만, 경제적 실익이 이러한 정치적 갈등을 일시적으로나마 억제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14_한일회담 가조인식(1965).JPG 한일회담 가조인식(1965) <출처 : 국가기록원>



협상의 험난한 여정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은 1951년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14년간의 긴 여정을 거쳐야 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법적 평가와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협상이 번번이 결렬되었다.


특히 1953년 구보타 발언 사건은 양국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켜 협상을 장기간 중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는 대일 관계 개선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국내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실질적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진정한 전환점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나타났다.


박정희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통해 과거사 문제보다는 미래 지향적 협력에 중점을 두었다.


1962년 김종필-오히라 비밀회담은 협상의 중요한 돌파구였다.


이 회담에서 양국은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방식에 대한 기본적 합의에 도달했다.


일본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는 당시 한국의 연간 예산 규모를 고려할 때 엄청난 규모였다.


국내 정치적 격변과 저항


한일협정 체결 과정은 극심한 국내 정치적 갈등을 동반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으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운동은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굴욕외교"라는 비판과 함께 박정희 정부의 정통성 자체가 도전받았다.


야당과 지식인층은 협정의 내용이 일본에게 지나치게 유리하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당한 배상을 받지 못했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특히 "이미 해결된 문제"라는 일본의 입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에 대해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는 6.3 항쟁으로 발전하여 계엄령 선포라는 극단적 상황까지 초래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의지로 협정 체결을 관철시켰다.


경제 개발의 필요성과 안보상의 고려가 역사적 감정보다 우선한다는 판단 하에, 정부는 국내 반대 여론을 억압하면서도 협상을 지속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경제협력협정, 재산청구권협정 등이 최종 체결되었다.


협정의 구체적 내용과 경제적 의미


한일협정의 핵심은 경제 협력 부분이었다.


일본이 제공하기로 한 8억 달러는 단순한 차관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종자 자본의 성격을 띠었다.


무상 3억 달러는 주로 사회간접자본 건설과 기간산업 육성에 투입되었고, 유상 2억 달러는 제조업 발전과 기술 도입에 활용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자본과 함께 일본의 선진 기술이 대거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철강, 조선, 화학, 전자 등 중요 산업 분야에서 일본의 기술 이전과 설비 도입이 이루어졌다.


포항제철소 건설, 울산 석유화학단지 조성, 현대조선소 설립 등 한국 중화학공업의 토대가 되는 프로젝트들이 일본 자본과 기술의 지원으로 가능해졌다.


민간 차원에서도 활발한 교류가 시작되었다.


일본 기업들의 대한국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합작 투자, 기술 제휴, 설비 도입 등 다양한 형태의 경제 협력이 전개되었다.


이는 한국 기업들이 일본의 경영 기법과 생산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4_한일회담 본보인식(1965).JPG 한일회담 본보인식(1965) <출처 : 국가기록원>



경제 발전에 미친 혁명적 영향


한일국교정상화와 일본 자본 도입은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은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자본과 기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압축 성장의 배경에는 일본과의 경제 협력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일본 자본의 유입은 단순한 자금 지원을 넘어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촉진했다.


농업 중심의 전근대적 경제 구조에서 제조업 기반의 근대적 산업 경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다.


특히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전략의 성공은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기술과 설비의 뒷받침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술 이전의 효과는 더욱 장기적이고 근본적이었다.


일본의 선진 기술을 습득한 한국의 기술자와 경영진들은 이후 한국 산업 발전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철강, 조선, 자동차, 전자 등 주력 산업에서 일본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술 축적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역사적 평가와 논쟁의 지속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경제 발전론자들은 이 협정이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박정희의 실용주의적 선택이 한국을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반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굴욕적 협정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당한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한 채 경제적 실익만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후 한국 경제의 대일 의존성 심화와 기술 종속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일국교정상화는 당시 한국이 처한 현실적 제약 하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상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경제 발전과 국력 신장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 인식의 문제와 경제 구조의 왜곡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14_정일권 국무총리 한일회담 조인.JPG 정일권 국무총리 한일회담 조인 발표 <출처 : 국가기록원>



현재적 의미와 교훈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는 현재의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경제적 상호 의존 구조의 출발점이었으며, 동시에 역사 인식 갈등의 근원이기도 하다.


당시 정치적 타협으로 봉합되었던 문제들이 오늘날까지 양국 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경제 개발과 역사 정의 사이의 딜레마는 개발도상국이 겪는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사례는 단기적 실익과 장기적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결국 진정한 화해와 협력은 경제적 이익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으며, 역사에 대한 성찰과 상호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오늘날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것은 1965년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한 성숙한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역사적 상처의 치유와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에도 기여해야 한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는 그 출발점이자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를 안겨준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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