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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저 호황: 한국경제의 역사적 전환점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2편 - 14

by 한정엽

1985년을 기점으로 한국경제에 나타난 '3저 호황'은 저유가(低油價), 저달러(低달러), 저금리(低金利)라는 세 가지 대외적 요인이 결합하여 창출된 경제적 호황을 의미했다.


이는 단순한 경기 상승이 아닌, 한국경제의 구조적 전환을 촉진한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당시 한국은 1980년대 초반의 경제 침체와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시점이었다.


3저 호황의 역사적 의미는 한국경제가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성장체제를 완성하고, 동시에 국제경쟁력을 획득하는 결정적 계기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압축성장의 절정기를 맞이했으며, 개발도상국에서 중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국제적 배경과 구조적 변화


1980년대 중반 국제경제환경의 변화는 한국경제에게 예상치 못한 기회를 제공했다.


1979년과 1980년 두 차례의 석유파동 이후 세계경제는 침체와 인플레이션의 이중고에 시달렸으나, 1985년경부터 국제유가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배럴당 30달러를 넘나들던 유가는 1986년에는 10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동시에 미국 달러화의 약세가 지속되었다.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이후 주요 선진국들이 달러 약세 정책에 합의하면서,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 제품의 국제경쟁력을 크게 향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저금리 현상은 세계적인 디스인플레이션 과정에서 나타났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경기 부양을 위해 통화정책을 완화하면서 국제금리가 하락했고, 이는 한국 기업들의 자금조달 비용을 크게 절감시켰다.


14_플라자합의.JPG 플라자 합의 당시 각국 장관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한국경제의 내재적 조건


3저 호황이 가능했던 것은 단순히 대외여건의 호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1960년대부터 축적된 한국경제의 내재적 역량이 이러한 기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통해 구축된 산업기반과 숙련된 노동력, 그리고 강력한 수출지향적 기업문화가 결합하여 3저 호황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특히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에서의 기술축적은 이 시기 수출 급증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삼성, LG, 현대 등 대기업들은 1970년대부터 축적한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국제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동시에 중소기업들도 대기업과의 협력관계 속에서 수출 역량을 강화해 나갔다.


저유가의 파급효과와 산업구조 변화


국제유가 하락은 한국경제에 다층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생산비용의 대폭 절감이었다.


에너지 집약적 산업인 석유화학, 철강, 시멘트 등의 기초소재산업에서 원가절감 효과가 두드러졌다.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같은 대규모 철강기업들은 연료비 절약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크게 향상했다.


저유가는 또한 운송비 절감을 통해 수출기업들의 채산성을 개선시켰다.


해운업과 항공업의 운영비용 감소는 한국 제품의 해외 진출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특히 중동 건설시장에서 활동하던 한국 건설업체들은 유가 하락으로 인한 중동 경제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운영비용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에너지 비용 절감은 가계 경제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연료비와 전기료 부담이 줄어들면서 가계의 실질구매력이 증가했고, 이는 내수 시장 활성화로 이어졌다.


자동차 보급이 급속히 확산되던 시기였던 만큼, 유류비 절감 효과는 자동차 산업의 성장에도 기여했다.


저달러 환경과 수출 경쟁력 강화


달러 약세는 한국의 수출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향상하는 핵심 요인이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대비 원화는 점진적 절상 압력을 받았지만, 여전히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은 크게 개선되었다.


특히 일본 제품과의 경쟁에서 상당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자산업에서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반도체와 가전제품 분야에서 미국과 유럽 시장 진출을 가속화했다.


1986년 삼성전자의 256K D-RAM 개발 성공은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 한국이 기술집약적 산업에서도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자동차산업의 성장도 괄목할 만했다.


현대자동차의 포니는 1985년 캐나다 수출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개시했다.


기아자동차 역시 소형차를 중심으로 수출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저달러 환경은 한국 자동차의 가격경쟁력을 크게 향상해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섬유산업에서도 고부가가치 제품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다.


단순 가공무역에서 벗어나 패션과 브랜드 개발에 집중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저달러 환경은 이러한 산업 고도화 과정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외부 조건이었다.


저금리와 투자 활성화


국제적 저금리 환경은 한국 기업들의 설비투자를 크게 촉진했다.


자금조달 비용 부담이 줄어들면서 기업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생산능력 확장과 기술개발에 나섰다.


특히 대기업들의 해외 자본시장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국제 자금을 활용한 대규모 투자가 가능해졌다.


반도체 산업에서의 대규모 투자가 대표적 사례였다.


삼성과 LG는 일본 기업들과의 기술격차를 줄이기 위해 과감한 설비투자를 단행했다.


이러한 투자는 높은 위험을 수반했지만, 저금리 환경이 제공하는 유리한 자금조달 여건이 이를 뒷받침했다.


14_이병철 회장이 1987년 7월 24일 종합기술원을 방문해 첨단기술 개발현황을 점검.JPG 1987년 7월 종합기술원을 방문해 첨단기술 개발현황을 점검하는 이병철 회장 <출처 : 전자신문>


중소기업들도 설비 현대화와 기술 개발에 적극 나섰다.


정부의 중소기업 육성정책과 저금리가 결합하면서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이 가속화되었다.


이는 대기업 중심의 성장구조에서 중소기업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동산 시장에서도 활성화 현상이 나타났다.


저금리로 인한 주택담보대출 금리 하락은 주택 구입 수요를 증가시켰고, 이는 건설업 호황으로 이어졌다.


다만 이러한 현상은 후에 부동산 가격 상승과 자산시장 불안정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무역수지 개선과 외환보유액 증대


3저 호황기 한국의 무역수지는 급격한 개선을 보였다.


1985년 약 8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던 한국은 1986년부터 무역흑자로 전환되었다. 1987년에는 78억 달러, 1988년에는 111억 달러의 대규모 무역흑자를 달성했다.


이는 한국 경제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무역흑자 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수출 증가율은 연평균 15% 이상을 기록했다.


1985년 305억 달러였던 수출액은 1988년 603억 달러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러한 수출 호조는 제조업 전반의 성장을 견인했고, 고용 창출과 소득 증대에도 크게 기여했다.


외환보유액의 급증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였다.


1985년 29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은 1989년 151억 달러까지 증가했다.


이는 한국경제의 대외 신인도 향상과 금융안정성 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동시에 원화 절상 압력의 원인이 되어 향후 경제정책의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3저 호황의 구조적 성과


3저 호황은 한국경제의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를 동반한 역사적 전환기였다.


이 시기 달성된 고도성장은 단순한 경기 호조를 넘어 한국경제의 산업구조와 국제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GDP 성장률은 1986년 10.6%, 1987년 11.1%, 1988년 10.6%를 기록하며 두 자릿수 성장을 지속했다.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기술집약적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이 본격화되었고, 특히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에서의 기술혁신은 한국이 '동아시아의 용'으로 부상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는 단순히 외국기술의 모방을 넘어 독자적 기술개발 능력을 축적하는 과정이었다.


국제시장에서의 위상 변화도 중요한 성과였다.


한국은 더 이상 단순 가공무역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이 아닌, 독자적 브랜드와 기술력을 보유한 중진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이러한 국제적 위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사회경제적 변화와 계층구조 재편


3저 호황은 한국 사회의 계층구조와 생활양식에도 깊은 변화를 가져왔다.


급속한 경제성장은 중산층의 확대를 촉진했고, 소비문화의 변화를 이끌었다.


자동차와 가전제품의 대중화, 해외여행의 자유화 등은 이 시기의 특징적 현상이었다.


고용구조의 변화도 주목할 만했다.


제조업 고용이 크게 증가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이동이 가속화되었다.


동시에 서비스업의 성장도 두드러져 산업구조의 다원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현대적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육과 기술인력에 대한 수요 증가는 인적자본 투자를 촉진했다.


대학 진학률의 상승과 기술교육 강화는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경쟁력 기반을 확충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경제성장의 성과가 사회 전반의 역량 강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정책적 과제와 한계


3저 호황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책적 과제들이 부각되었다.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불균형과 부작용들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다.


지역 간 발전격차의 확대, 환경오염 문제의 심화, 노사관계의 긴장 등이 주요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대외경제 의존도의 심화는 또 다른 구조적 문제였다.


수출 의존적 성장모델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내수시장 육성과 경제구조의 균형 발전이 새로운 과제로 제기되었다.


원화 절상 압력과 국제수지 흑자 누적은 향후 경제정책 운용에 새로운 제약요인이 되었다.


금융시장의 발전 지체도 중요한 한계였다.


실물경제의 급속한 성장에 비해 금융시장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이는 자본배분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기업의 자금조달 구조를 왜곡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4_3저호황.JPG 3저 호황을 설명하는 방송 <출처 : 위키피디아>


역사적 의미와 교훈


3저 호황은 한국경제 발전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외부적 기회요인과 내부적 역량이 결합하여 창출된 성장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제경제환경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축적된 산업기반과 인적자본, 그리고 강력한 성장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의 경험은 외부 의존적 성장모델의 한계와 위험성도 보여준다.


3저라는 외부조건에 크게 의존했던 성장은 이러한 조건이 변화할 경우의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1990년대 들어 국제경제환경이 변화하면서 한국경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3저 호황의 경험은 또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타이밍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적절한 시기에 나타난 유리한 외부조건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준비된 역량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이는 현재의 경제정책 수립과 미래 발전전략 구상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3저 호황은 한국이 압축성장의 마지막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선진국 진입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후 한국경제가 겪게 될 다양한 도전과 기회의 출발점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3저 호황의 경험과 교훈은 오늘날에도 한국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소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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