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땅끝마을!
쏠비치 진도에서 조식을 해결하고, 주변을 산책한다. '리조트'니까 주변에 산책로도 잘 되있고 바닷가에 나무데크도 잘 깔려있고 그런거 아니야? 하는 로망과 기대를 품지만, 아침부터 비구름이 잔뜩 껴있다. 우비와 슬리퍼를 하나 사서 나가본다.
다들 사진 찍어온다는 유명한 포토존에도 가본다. 비바람에 웃긴 사진만 잔뜩 찍어왔다. 발가락이 얼어버려 더이상 못버틸 즘 우리는 숙소로 다시 돌아와 체크아웃을 했다.
해남으로 넘어간다. 땅끝마을, 땅끝마을 말로만 많이 들어봤던 그 곳. 삼십년이 넘도록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괜히 기대가 된다. 그건 그렇고 돌아보니 사실상 진도에서는 별로 본 게 없네.
이 날씨에 두륜산 케이블카를 타러 향한다. 와, 날씨가 예술이다. 올라가는 길에 케이블카에서 두륜산에 대해 이런저런 해설이 나온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남편은 사뭇 진지한 어투로 '나는 쓰레받기 륜이라는 한자가 있는지 몰랐네?' 란다.
"에? 무슨 말이야? 쓰레받기 륜이 대체 어디서 나온 한자야?"
"아까 방송에서 머리 두, 쓰레받기 륜 해서 두륜산 이라고 하지 않았어?"
나는 폭소했다. 비구름 가득 낀 우중충한 하늘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사람 수가 다섯명도 채 되지 않는 그 휑한 산 위에서. 남편은 내가 왜 웃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벙찐 표정으로 있었다.
"머리 두에 수.레.바.퀴 륜이었어 쓰.레.받.기가 아니고, 이 아저씨야!"
둘은 배꼽을 잡고 미친사람들처럼 한참 웃어제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고계봉이라는 곳까지 약간의 트래킹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고도가 꽤 높은 데까지 올라온지라 바람이 더 세게 불기시작했고 빗방울도 간간이 흩뿌렸다.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수준이라 과연 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호기심에 한 번 가보기로 한다. 생각보단 가까이에 고계봉이 있었다. 구름이 너무 심해서 고계봉 뒤로 보이는게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는 도시나 산 경치가 보이겠지?
몇 년 전 독일 출장을 갔다가 스위스를 여행하고 온 적이 있다. 내 출장일정이 끝난 시점에 맞춰서 남편이 스위스로 왔고, 우리는 매일매일 트래킹을 하면서 산을 타거나 케이블카를 탔다. 쉴트호른에 가던 날이 꼭 이랬다. 그 땐 더 춥고 더 높아서 눈보라가 휘날렸다.
비바람을 맞고 들어온 대합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같이 올라온 분들은 이미 바로 앞차를 타고 내려가신듯 했고, 간식거리를 판매하시는 아주머님과 케이블카 승무원(?)분만 한 분 계셨다. 우리는 진열대에 놓인 라면을 보고 눈을 마주쳤다. 그 때와 비슷한 날씨라니, 컵라면은 당연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쉴트호른에서 먹은 신라면을 떠올리며 아무도 없는 두륜산 케이블카 대합실에서 새우탕과 튀김우동을 흡입했다.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사찰, 미황사에 다다랐다. 찬바람에 지쳤는지 미황사까지 오는 길에 우리 둘은 졸려 죽을뻔했다. 미황사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한 시간 가량 쥐죽은 듯이 잤다.
여전히 하늘이 흐렸고,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아 속상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 때 미황사를 다녀오고 나서 미황사 대웅보전이 22년도부터 3년간 해체복원공사에 들어간다는 기사를 봤다.
749년에 이런 건물이 지어지다니. 사찰 터 뒤로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서있는 것은 보고도 잘 믿겨지지 않는 놀랍고 아름답고 압도되는 경치다.
땅끝에 왔으니 땅끝전망대로 향한다.
모노레일 대기실에서 고구마 세 박스를 사서 양쪽 집에, 그리고 우리 집에 보낸다. 집에 와서 먹어보니 이 보다 맛있을 수 없고, 마트에서 사는 고구마보다 흙이 더 밝고 노란 빛을 띄었다. 황토에서 자란 고구마인가보다.
전망대 안에서 창문으로 보이는 구름과, 구름 사이로 들이치는 볕과, 멀리 보이는 작은 섬들이 기가막히다. 지도에서 한반도 끝, 망망대해가 시작되는 그 지점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하다.
물은 그다지 파랗지 않았다. 음, 땅끝마을은 이런 느낌이군.
사람이 없던 이 날 역시 조용했다. 내려오는 길엔 인적이 드물었는데, 갑자기 슈퍼 앞 박스 안에서 파다닥! 하는 소리가 나더니 검정색 솜뭉치가 휙 하고 나왔다. 어라? 뭐야? 하고 가만 지켜보는데 글쎄 주먹만한 새끼고양이가 나와서 폴짝폴짝 뛰어노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그 귀여움에 치여 우리는 한참을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으며 바라보았다.
숙소가 있는 완도로 향한다. 가는 길에 완도시장에서 꽤 유명한 명품전복 궁에서 전복코스를 먹는다. 3만원인 것 치고는 가짓수도, 음식 각각의 맛도 훌륭했다. 전남 완도군 완도읍 개포로 34-1, 명품전복 궁.
한참 식사를 하는 와중에 펜션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남편이 불편한 내색을 비춘다. 주인이신 할아버님이 못 기다린다고, 빨리 오라고 재촉하셨단다. 대강 먹어치우고 청해진에 있는 한옥 펜션으로 향한다.
이미 어두컴컴했고, 그 주변에 펜션이 몇 개가 더 있었고, 우리가 묵는 곳은 하필 가장 위쪽에 있어서 차량이 진입하기에 좀 까다로운 위치였다. 전남 완도군 군외면 청해진로 548-10, 청해진한옥펜션
여차저차 주차를 하고 방을 안내받았는데, 왠걸, 내가 본 방이 아니었다. 내가 인터넷에서 봤던 '보길도'라는 방은 아래 사진처럼 사방으로 탁트인 넓은 방이었는데 안내받은 방은 창문조차 없는 5평이나 될까 싶은 작은 원룸형 방이었다. 아마도 예약할 때 참고했던 블로그 글에서 방 이름을 잘못 적어둔 듯 싶다. 아니면 방 이름이 바뀌었거나. 아무튼 그 방은 훨씬 많은 인원이 사용할 수 있는 독채형 건물로 우리가 묵은 건물 아래쪽에 위치해있었다. 어쩐지, 너무 저렴했다.
기대했던 방이 아니라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생각치 못하게 꿀잠을 잤다. 이태까지 묵은 숙소들 중에서 가장 깊은 잠, 가장 개운한 잠을 선사한 곳이다. 왜 그럴까? 하고 둘이 고민한 결과, 온돌이라고 결론지었다.
역시 한국인은 온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