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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미 Apr 01. 2021

'난 공감 능력이 부족해'라고 말하는 자를 조심하라

원래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새빨간 거짓말

연애 중인 친구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남자 친구가 ‘솔로몬 병’, 즉 모든 상황에서 본인은 현명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척하면서 정작 상대의 감정이나 아픔에 공감하지 않는 병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회사에서 부당한 일로 꾸중을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면 “정말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 라고 말한다거나, 기분 나빴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네가 과민 반응하는 거 아니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주변에 이야기했더니 남성은 원래 단순하고 무뚝뚝하니 네가 이해하라는 반응을 보여 답답하다고 했다.


우리가 질리도록 들어온 이야기처럼, 남자는 이성적으로 판단해 솔루션을 찾고 여자는 감정적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존재일까?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는 진부한 책 제목처럼 남자가 여자보다 상대적으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과연 타고난 기질 차이일까?


오리건대학교의 크리스티 클레인과 사라 호지스 교수는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대학원 입학시험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의 영상을 보여준 뒤 학생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추론하라고 지시했다. 총 세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고, 두 번째 그룹에는 추론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에는 추론 결과가 정확할수록 돈을 주겠다는 조건을 부여했다.  


그 사람은 공감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공감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조건을 부여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여성의 공감 능력이 더 높은 것으로 측정됐다. 하지만 감정적 공감을 정확하게 수행할수록 돈을 받기로 한 세 번째 그룹에서 남성의 공감 능력이 월등히 향상됐을 뿐만 아니라 공감 능 력에서 여성과 유의미한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피드백을 받는 조건에서도 남성의 공감 정확도가 향상되기는 했지만 특별히 의미 있는 수치는 아니었다. 즉, 여성들은 공감 능력이 높을 것이라는 사회적 기대로 인해 항상 높은 공감 수치를 보이지만, 남성들은 ‘돈’이라는 확실한 보상이 주어질 때만 선택적으로 공감한 것이다.



연구 사례를 하나 더 언급하자면, 하버드대학교의 사라 스노드그라스 교수는 성별과 관계없이 어느 상황에서나 항상 하급자가 상급자의 감정과 생각을 예민하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더불어 여성의 직감이라고 불 리는 능력은 사실 ‘하급자의 직감’이라고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성보다 여성의 공감 능력이 선천적으로 뛰어 나다는 명제가 참이 되려면 어떤 상황에서든 여성이 더 높은 공감 능력을 보여야 하는데, 연구 결과 여성 리더가 남성 하급자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보다 남성 하급자가 여성 리더의 감정과 의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진실은 이렇다. 공감 능력은 사실 하급자에게 더 필요한 능력이다. 권력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다면 타인, 특히나 상급자의 감정과 생각을 빠르게 읽어내는 레이다를 장착하는 게 생존에 유리할 테니 말이다. 여자 친구의 고민에는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하신 판사님이 되면서, 상사나 군대 선임 앞에서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남성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꽃뱀 여부부터 밝히려 드는 남성들의 행태도 설명이 된다. 남성은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가 될 확률이 거의 전무할 테니 굳이 피해자에게 공감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성은 공감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권력 역학에 따라 선택적으로 공감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해'는 사실
'나는 너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선택적 공감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해”라고 선언 하는 사람을 특히 주의하자. 이는 해석하면 “나는 너에게 맞춰줄 의향이 없어”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권력 역학과 이익을 따져서 공감하지 않기로 한 것을 원래 저런 사람이라며 이해해줄 필요는 없다.


저마다 공감하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다. 누군가는 문제 해결을 위한 합리적인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나름의 공감하는 방식일 수 있다. 직장 생활을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어떻게 하면 회사에서 성과를 올릴 수 있는지, 업무 능력 개발을 위해 책을 읽으면 좋을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반대로 당신이 느꼈을 감정에 중점을 두는 사람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느꼈을 기분을 이해하며 다독여줄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문제 해결 방법인지, 아니면 감정적인 서포트인지 분명히하고 상대와 소통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감정적 서포트가 필요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서 방법론을 늘여놓는다면 그 조언이 진심인지, 맨스플레인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공감 능력은 고도로 발달된 지능이자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선천적 공감 능력 부족’ 카드를 들이미는 일부 남성들은 본인이 화성인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배려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한 지구인이라는 사실을 좀 인정하고 받아들이길 바란다. 화성인은 무슨, 화성에서 10초라도 맨몸으로 견디면 그때 인정 해주겠다. 더불어 솔로몬 병에 걸린 사람을 애써 이해해 줄 필요도 없다. 솔로몬이 아이를 둘로 자르라고 판결을 내렸던 이유도 진짜 아이의 엄마를 찾기 위함이었지, 중립을 위한 중립에 서기 위함은 아니었지 않나. 


따뜻하고 친절한 말과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은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사회적 자원이다. 하지만 이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소진되고 고갈되는 유한 자원임을 기억하자. 공감에는 많은 에너지와 수고가 투입된다. 상대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상대의 기분과 감정을 파악해야 하며, 위로의 한마디를 던질 줄도 알아야 한다. 여간 수고로운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관계에서 당신만 일방적으로 공감을 요구받는다면 주의하도록 하자. 이것은 이성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감정적 서포트를 제공한다면 이는 감정 자원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체도 없는 타고난 차이를 빌미로 한쪽 성별만 일방적으로 공감 노동을 강요한 이 사회에서 이제 조금 드라이해져도 괜찮다.





여성들이 더욱 주체적이고 단단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생활밀착형 페미니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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