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것보단 낫지만 있어도 큰 의미는 없는
시험을 준비한 계기는 회사 내에서의 내 길을 확실히 정하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 질끈 감고서 이 회사에 들어왔고, 약 7년간 이런저런 부서를 떠돌며 방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만간 10년 차가 되어버린다는 시간의 무정함을 새삼 목도하고서는 이제 슬슬 자리도 좀 잡고 뿌리도 내려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들레 홀씨로 바람에 날린 지 어언 7년째이고 이제는 땅에 내려앉아 붙박아야 하는데, 그 착륙지점을 과연 어디로 해야 하는가? 내가 좀 더 젊고 책임질 가족이 없다면야 회사를 훌훌 떠나 완전히 다른 새로운 출발을 도모할 수도 있겠으나, 호기롭게 배수의 진을 치기에는 아기를 키워야 한다는 녹록지 않은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 회사생활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요즘, '애당초 이 회사를 들어오지 않았더라면'이라는 후회를 자주 하곤 하는데,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지금의 내 모습은 10년 전의 내가 만든 모습인 것을.
그리고 나의 이러한 '회사에 대한 불만족'이 요즘 2030 사이에 들불처럼 번지는 일종의 이직 유행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납득할 정도로 지금 다니는 회사에 진하게 몸 담은 적이 있었던가? 절대완벽의 행복과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늘, 파랑새를 좇기 위해 괜히 현실을 깎아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 떠나서, 내가 진정 뭘 하고 싶은 것인지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건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아닌가? 남들이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떠난다고 하니까 괜히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은 아닌가?
우치다 다쓰루의 『하류지향』에서 나왔듯이, 내가 하는 일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을 충분히 먹여야 한다. 그렇게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만족, 그리고 나의 업무능력이 사후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철승 교수의 『오픈 엑시트』에서 알 수 있듯 우치다 선생의 말은 어쩌면 동아시아의 벼농사 체제 특성을 물려받은 연공제 체제 직장에서만 국한되는 것일 수 있다. 나중에는 분명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언제까지고 묵묵히 일에만 매진하는 태도에는 분명 답답함과 한계가 있다. 내가 나의 스킬셋(skill set)을 부지런히 확장하고 업계 내에서의 인지도와 명성을 어느 정도 쌓게 되면, 지금 현실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경로로 뻗어갈 수 있는 다양한 출구, 오픈 엑시트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위 두 가지 책의 내용을 엮으면 이런 매듭이 지어진다. 노동에는 최소한의 일정 시간을 먹인 뒤에야 그에 대한 합당한 평가가 사후적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아직 내 노동에 나 스스로가 납득할 정도로 충분한 노력과 시간을 먹이지 않았다. 또한 전통적인 연공제에서 직무제로 급변하는 현시대에서, 내가 나의 스킬트리를 영민하게 설계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위치를 인정하되, 나의 컨셉과 테마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관리하며 그 배경의 이곳저곳을 수놓는 나의 성실한 자수를 한땀한땀 박아 넣어야 한다. 그것이 현실과 미래를 연결하는 방법일 것이다. 두 다리는 현실 위에 분명히 딛되, 두 손은 미래를 향해 뻗는 자세. 배움이란 것은 배움의 당위성을 알지 못한 채로 일단 배움의 한가운데에 던져지고, 그것을 정신없이 통과한 나중에서야 그 의미와 쓸모를 알 수 있게 되는 “시간적인 개념”이므로, 당장 무엇이 이루어지진 않아도 무엇이든 해 보자. 노느니 염불 왼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다니는 회사는 이런저런 부서도 많고 오만가지 잡다한 사업을 문어발식으로 전개하는데, 교통사고 관련 업무도 처리한다. 교통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난다. 특히 인구압이 높은 서울에서는 도로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를 초과한 차량들이 돌아다니고, 이는 필시 사고로 이어진다.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히듯이, 좁은 땅에 많은 차가 득실거리니 크고 작은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재산 중 집 다음으로 비싼 것이 자동차다.
교통사고는 분명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분야다. 막상 사고가 났을 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관련 법령은 뭐가 어떻게 되는지, 처리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남들이 알지 못하거나 잘 모르는 분야는 선점할 만한 고지高地다. 어차피 육아 말고는 딱히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요즘, 짬을 내서 공부해 보자 마음먹었다.
시험은 1년에 1회 실시한다. 보통 9월이나 10월 즈음에 실시하는 듯하다. 객관식 1차와 주관식 2차로 이루어져 있고, 1차와 2차 전부 하루 안에 다 치른다. 시험시간은 1차와 2차 각각 150분(1시간 반)이고, 사이에 점심을 먹는다. 시험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촉박함에 마음을 졸이게 되는 류의 시험은 아니다.
1차는 총 4과목으로, 교통관련법규, 교통사고조사론, 교통사고재현론, 차량운동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25문제씩 총 100문제다. 2차는 차량운동학을 베이스로 한 주관식 계산 문제다. 5문제가 출제되고, 그중 3문제를 골라서 답안을 작성하면 된다. 대부분의 자격증 시험과 마찬가지로, 1차는 평균 60점 이상에 40점 면과락이 필요하다. 2차도 평균 60점 이상이어야 한다.
응시료는 77,000원이다. 꽤 비싼 편이다. 합격 후 실물 자격증을 발급받는 것도 합격자가 돈을 지불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국가공인 자격증이라고 홍보하고 있기는 하나 사실상 민간자격증으로서 공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로교통공단 차원에서 벌이는 하나의 '사업'으로서 시행되고 있는 시험, 딱 그 정도이지 싶다.
쌀집 계산기 말고, 공학용 계산기가 필요하다.
대단한 계산 스킬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삼각함수, 제곱, 제곱근 정도만 계산식에 넣을 수 있는 기기면 된다. 계산 과정을 디스플레이에 연속해서 기록해 주는 기능이 있으면 계산실수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에 좋다. 2차방정식까지 계산해 주는 기능도 있다면 근의 공식을 손으로 계산하고서 답안지에 적는 시간을 아껴주므로 좀 더 편리하긴 하다.
나는 올해 6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 동안 공부했다. 직장병행에 육아병행이긴 했지만 회사 일이 바쁘지 않아서 틈틈이 공부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시중 서점에서 도로교통사고감정사 관련 수험서적을 판매하긴 한다. 책의 구성을 두 파트로 나누면 앞쪽은 각 과목별 개념설명과 예상문제, 그리고 뒤쪽은 과년도 기출문제 및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나도 처음엔 이 책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고, 여느 시험 준비와 마찬가지로 기출문제를 훑으면서 책 앞부분에 나와있는 개념 설명을 동시에 보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책을 산 돈이 아까울 정도로 책이 엉망이다. 그저 법령을 복사해서 붙여넣은 듯한 수준의 조잡한 구성, 그리고 시험에서 딱히 출제되지도 않는 복잡하고 어려운 지식들을 성의 없이 대충 엮어다가 구겨 넣은 듯한 무성의한 내용에 화가 났다. 예상문제도 기출문제 출제 경향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서, 네이버와 유튜브를 뒤져가며 꾸역꾸역 풀다가 그만뒀다.
그래서 나는 책 뒤쪽에 있는 기출문제 파트만 칼로 잘라내서 스프링 제본처리했고, 나머지 앞부분은 전부 버렸다. 도로교통공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기출문제를 다운로드하여 출력해서 풀어볼 순 있지만, 하나하나 출력하기도 귀찮을뿐더러 해설이나 풀이과정은 어느 정도 있어야 공부에 속도가 붙기 때문에 수험서에 실린 기출문제 모음을 택했다.
그리고 네이버에 '한국도로교통사고감정사협회' 카페가 있다. 여기에 가입을 하고, 약 5만 원 정도의 회비 등을 내면 협회에서 만든 교재와 동영상 강의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나는 (돈을 아끼려고..) 가입하지 않았다. 기출문제만으로 아주 충분하고도 넘친다. 사설 학원에 돈을 내고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는 것은 더더욱 필요가 없다.
○ 객관식
나는 기출문제를 토대로 각 과목에 필요한 내용들만 아이패드 굿노트에 긁어모았다가, 시험 막판에 종이로 출력해서 달달 외웠다. 기출문제에 나오지 않은 내용은 웬만해선 넣지 않았다.
- 교통관련법규
도로교통법, 교통사고처리특례법,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등이 출제된다. 은근히 세세하고 어렵게 나오는 부분 중 하나이지만, 과락만 면하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면 그리 부담스럽진 않다. 어차피 기출되는 부분만 출제되므로 기출문제를 반복해서 풀면 큰 문제는 없다. 그래도 보다 정확한 이해를 원한다면, 유튜브에 '하루총경TV'를 검색해서 교통경찰 관련 강의를 발췌하여 들어보면 도움이 된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경찰수험생용 강의를 모아놓은 채널인데, 세세하게 설명을 잘해주는 듯하다(물론 이 시험에서 요구하는 수준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다루기 때문에 오버인풋이긴 하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듣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해당 강의용 교재를 중고서점에서 구입했고, 교통 파트에서 본 시험에 반복 출제되는 부분만 발췌하여 아이패드에 넣어놓고 공부하였다. 법령정보센터에 들어가서 필요한 법조항들을 찾아 캡쳐해놓기도 했다.
- 교통사고조사론&교통사고재현론
이 두 과목은 자동차의 구조, 교통사고 발생 흔적, 보행자 충격의 종류, 신체 상해의 종류, 차량 손상의 종류 등에 관한 내용이 출제된다. 과목이 두 과목이긴 한데, 공부해 보니 사실상 한 과목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다루는 개념의 구분이 모호하므로 그냥 한 과목이라 생각하고 공부해도 무방하다. 오직 기출문제로만 커버 가능하다. 나오는 문제만 나오는 편이고, 생소한 문제가 몇 개 나와도 그 정도는 그냥 틀리고 지나가면 되므로 문제 될 것 없다. 나는 기출문제를 토대로 각 개념들을 아이패드에 정리해 놓고 공부하였다.
- 차량운동학
삼각함수를 비롯한 기초 수학과 함께 각종 기초물리학 지식이 동원되는 과목이다. 수학 및 과학 지식이 없다면 공부 초반에는 꽤 애를 먹겠지만, 그래도 반복해서 공부하면 오히려 점수가 가장 잘 나오는 과목이다. 유튜브에 '불새맨'이라는 채널이 있다(https://www.youtube.com/@bulsaeman1572). 도로교통사고감정사 협회에 소속된 분께서 운영하시는 채널인 듯하다. 차량운동학과 관련된 기초 지식이 없다면, 여기에 들어가서 '차량운동학' 재생목록을 들으면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절반만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처음엔 전부 공짜인 줄 알고 들었는데, 강의목록의 절반을 듣고 나니 나머지 절반은 위에서 말한 한국도로교통사고감정사 협회에 가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은 강의들을 보기 위해 돈을 주고 가입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절반 정도만 들어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지식은 얼추 습득했다고 판단, 나머지는 기출문제를 풀며 독학으로 해결했다. 반드시 필요한 공식과 빈출되는 패턴을 아이패드에 모아 정리해 놓고 자주 들여다보았다.
결론적으로, 객관식과 주관식 모두 기출문제 10개년치만 달달 풀면 된다. 기출을 토대로 유튜브 등 인터넷 검색을 통해 기본지식과 추가적인 자료를 모아나가면 된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일절 필요 없다. 모의고사도 필요 없다. 모의고사까지 챙겨서 풀 정도의 시험은 아니다.
취미 삼아, 자기계발 삼아 따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이 자격증만으로 취업이 해결된다거나, 진짜로 교통사고를 척척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이 이 자격증의 치명적인 한계다. 내가 이 시험을 준비하자고 마음먹었을 때의 그 깊은 고민와 부푼 마음은 자격증을 취득한 후 오히려 먹다 남은 음식처럼 식어버리고 오래된 풍선처럼 바람이 빠져버렸다. 자격증은 취득했지만 나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각종 기업과 기관에서 원하는 인재상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교통사고를 처리에 면허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대학교 교양 수업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난이도도 낮고 공신력도 없다시피 한 애매한 시험이다.
따라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도모할 작정으로 이 자격증을 취득하겠다고 한다면 그다지 추천하진 않는다. 그 시간에 다른 것을 공부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다만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갖춰진 스펙에 몇 글자라도 추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따 놓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수단으로서는 나쁘진 않겠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을 위한 자격증, 정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험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이 자격증이 나중에는 누구나 취득을 원하는 각광받는 인기 있는 자격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그래도 마냥 손 놓고 놀지만은 않아서 작은 뿌듯함을 느낀 시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