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노래 (29)
장마철을 전후하여 5월 중하순부터 7월 중순 무렵까지는 대체로 주말에 집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집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는 건 아니고, 토일 모두 6킬로 가까이 달리고 생필품 사러 다녀오는 걸로도 부족한 최소한 1만보의 걸음을 채우기 위해 동네를 산책하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내 주말 루틴이다.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읽고,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고 장마철 이후 갈 여행 계획을 세우며 보낸다. 유튜브로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로 매불쇼를 들으며 요리를 하는 것도 빠질 수 없다. 저녁에 가볍게 한잔 하기 위한 안줏거리나 약속이 없는 평일저녁 간단히 데워서 먹을 것들을 만드는 것은 소중한 나의 주말일상 중 하나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왜 그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제오늘 주말일상을 보내며 산울림 노래를 많이 듣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산울림은, 이문세나 김광석, 이승환처럼 어느 특정 시점에 내가 폭발적으로 좋아했던 가수도 아니고 더구나 나와 동세대의 가수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적어놓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열곡 가까이 되어 깜짝 놀랐다. 그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인생 노래라고 할 만큼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곡들도 여러 개다. 문득 궁금해져 산울림이라는 그룹에 대해 나무위키 등에서 찾아보니 내가 모르던 사실도 많았다. 그들이 형제그룹이었고 리더인 김창완과 둘째 김창훈이 서울대를 나온 사실 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음악평론가들의 평가, 대학가요제 참가와 관련한 에피소드, 최초에 그들이 지향했던 음악 스타일, 그리고 산울림이 활동을 중단하게 된 계기 등 조금씩 알아가다 보니 산울림이라는 밴드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사실 산울림의 노래들 대부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3인조 형제그룹의 맏형 김창완이 주로 만들었다. 김창완을 생각하면, 언제나 소년 같은 순수한 이미지인데 54년 생이라는 걸 알고 살짝 충격이었다 언제부턴가 만능 연예인이 넘쳐나는 시대라지만, 김창환이야말로 가수, 작곡가 말고도 라디오방송 디제이, 교양프로 사회자, 탤런트 그리고 화가까지 그야말로 스펙트럼이 넓은 엔터테이너이다. 김창완이 만든 많은 산울림의 음악은 수많은 후배 가수들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아이유, 잔나비, 장기하 등이 산울림과 김창완을 추앙하고 곡들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김창완이 만들고 부른 노래 중에는 어딘가에 필사해두고 싶은 가사들이 많다. 단편적으로만 보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외로움이 느껴지는 곡들도 많지만, 정작 마음이 흩트려져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을 때나 왠지 도망치고 싶거나 그리움이 몽글몽글 피어날 때 그의 노래를 찾아 듣게 되는 것 같다. 어느 유튜브 방송에 나온 그가 젊었을 때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염세주의자였다고 고백하는 인터뷰를 보며, 그의 노래 가사마다 묻어나는 인생의 깊이와 세상을 관조하는 자세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비관적 낙관주의자‘로서 세상을 살아온 나로서는 그에게 동지애 비슷한 것마저 느꼈고, 그의 삶의 궤적을 배우며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불안과 걱정으로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오늘 할 일을 해나가며, 상처와 좌절을 또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하루하루 조심히 그러나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덧 껍질은 단단해지고 알맹이는 잘 영글게 되는 삶이 그가 만든 노래에 오롯이 담겨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면 그는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른 가수가 아니라, 훌륭한 인생 선배가 아닌가 싶다. 모르긴 몰라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는 아픔을 극복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라떼’를 외치지 않는 어른의 품격이 느껴지는 그를 닮고 싶다. 마음만은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김창완을 따라 하고 싶다.
슬픔은 간이역에 코스모스로 피고 (너의 의미)
그대 떠나는 날에 잎이 지는가
처음부터 긴 이별이었네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달빛이 숨어 흐느끼고 있네 (회상)
하릴없이 이리저리 헤매다 나 홀로 되어 남으리 (독백)
당신이 잠든 밤에 혼자서 기도했어요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김창완의 노래들
1) 독백 - 고등학교 1학년 경이었나? 그날은 토요일이라 사설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려고 졸음을 참으며 공부하고 있었다. 공부에 별로 뜻이 없어 보였으나 독서실에는 꾸준히 나오던 키가 껑충했던 ‘주관’이란 이름을 가진 놈이 “야 이 노래 너무 좋지 않냐? 너도 한번 들어봐”하며 자기 이어폰을 내게 내밀었던 곡이다. 새벽 1-2시경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마음에도 암울했던 내 처지를 읊고 있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던 기억이다.
https://youtu.be/AZNhQ7GjLO4?si=cTIQl0Ael_D-Bn02
2) 아니 벌써 - 산울림의 77년 데뷔곡으로 나온 지 무려 40년 가까이 된 노래이다 (아래 영상은 14년 전). 언제 들어도 신나고, 듣고 있다 보면 국내의 많은 록그룹에 산울림이 미친 영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https://youtu.be/zuOqi5zWZXQ?si=D3a8DMyaKmffQnVa
3) 너의 의미 - 아이유가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야말로 천재가 천재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김창완의 원곡도, 아이유가 부른 리메이크 버전도 좋지만, 둘이 콜라보 한 이 영상은 정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https://youtu.be/3Nyp7uHofOk?si=umJrbrDV-olSPXlC
4) 찻잔 - 사실 이 노래는 김창완이 곡을 만들어 노고지리라는 또 다른 형제중심의 그룹에 선사한 곡이다. 전주에 나오는 기타 사운드만 들어도 나는 이미 어두운 그 옛날 어딘가 추억의 카페 안에 들어가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것 같다.
https://youtu.be/__uVOR5XGyo?si=Mdo-vUqu-GrwH24z
5)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 비교적 최근인 2019년에 김창완이 솔로로 발표한 곡. 이 단순한 멜로디와 뻔한 가사가 또 나를 울린다. ‘잠든 밤에 혼자 기도했다‘는 가사에 너무 공감하면서 이렇게 나도 나이가 들고 있구나를 새삼 느끼게 해 준 곡이다.
https://youtu.be/7QIZ0hmXMFo?si=Hs--MvQMJy-5j_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