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하다’와 ‘아득하다’.
한 끝 차이의 철자, 발음도 닮았지만 시선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저 멀리, 닿을 듯 말 듯한 곳을 향한다.
다른 하나는 품 안 깊숙이, 지금 여기의 온기를 가득 안는다.
‘아늑함’은 행복을 연상시키는 수많은 상태 중 하나다.
익숙한 듯 편안하면서도 소란스럽지 않고,
조용히 곁에 머물며 결코 차갑지 않은...
내가 좋아하는 특유의 그런 공기와 분위기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CBS 음악FM 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를
들릴 듯 말 듯 틀어놓고 책장을 넘길 때,
졸음이 천천히 몰려오는 그 순간.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따뜻한 도서관 창가에 앉아
가끔씩 바깥을 바라보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책을 읽거나
뭔가를 메모하며 기록하는 그 시간.
하루의 루틴을 충실히 지키고,
편한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술 몇 잔에 기분이 좋아진 밤.
“이 정도면 됐다”며,
더욱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짧게 기도 같은 다짐을 하는 그 순간.
반면 ‘아득함’은 어떠한가.
팔순을 넘긴 어머니의 눈 속에 깃든
멀고도 깊은 바다.
고등학교 시절.
몸이 허약해 몇 번의 입원과 수술을 겪고 나서,
“이제 내 인생은 바닥을 쳤다.”며
새벽녘 억지로 정신 승리를 유도하던
그 아득한 기억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데,
괜히 긴장하고 걱정돼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느라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던 밤.
아득함으로 넘쳐나던 그날들.
저기까지 부지런히 걸어가면
끝이 보일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내가 또 가야 할 길.
그 먼 곳의 그림자.
삶은 두 단어가 번갈아 스치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온전히 한쪽만 붙잡을 수 없기에
우리는 늘 아늑함과 아득함 사이를 오가며 산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아늑함을 지키고자
나는 또 아득한 터널을 향해 걸어간다.
어머니의 아득한 눈빛에 가슴이 먹먹해져
당신의 남은 여생이 편안하고 아늑함으로 충만하시기를
매주 하느님께 기도한다.
아늑함과 아득함.
둘 사이의 경계 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손끝으로 느낄 수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만 닿을 수 있는 것.
그 애틋함 속에서
나는 오늘도 문득 아늑하고,
조금 아득하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