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꽉 막힌 도로 위 휘황찬란한 외제차들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였다. 택시 창문을 조금 내렸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밤을 느낄 찰나였다. 연신 크랙션을 누르던 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사실 택시를 타자마자, 창문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에게 말을 걸지 마시오’ 소심한 방어였다. 그 방어가 무색하게 아저씨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자 마지막 말이 들렸다. “你是韩国人吗?” (너 한국사람이야?)
중국에 온 지 5개월쯤 지났을까. 이곳에 오게 된 건 순전히 남편의 주재원 발령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살던 시골의 아담한 이층 집은 볕이 잘 들어 포근했다. 동네 언니들은 볕만큼이나 따스한 사람이었고. 나는 좁고 깊게 사람을 사귀었다. 그래서인지 곁에는 소수의 믿을 만한 친구와 언니와 동생이 있었다. 심심하다면 심심할,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나날이었다. 안정적인 공간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나의 인생은 익숙한, 안정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그런 나에게 해외 생활은 잔잔한 물결 위 큰 파장과도 같았다.
중국 아파트 단지에는 유독 한국 엄마들이 많았다. 그들은 새로운 인물에게 관심이 없었다. 셋, 넷 끼리 똘똘 뭉쳐 다녔다. 어쩌다 하는 질문은 이러했다. “아이 몇 살이에요? 영어 어느 정도 해요? 영어, 중국어 과외해요?” “골프 쳐요?” “교회 다녀요?” 하, 친해지기는 글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이는 영어 대문자만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학교에 꼬박꼬박 가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다음 골프와 교회도 ‘아니요’ 이면 대화는 뚝 끊겼다. 다행히도 한 줄기의 빛처럼,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가 몇 생겼고 그녀들 앞에서만 나는 수다쟁이가 된다.
어젯밤 남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중국에 온 주재원 중, 본인이 ‘성공사례’로 불린단다. 아이는 국제학교에 거부감 없이 잘 다니고, 아내도 오자마자 잘 적응해서 혼자 다닌다며 말이다. 실제로 아이가 학교생활을 견디지 못해서, 아내가 우울증이 생겨서 일찍 복귀하는 사례도 적잖이 있는 모양이다.
‘잘 적응해서’라는 말에 울컥했다.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이 매우 매우 느린 나로선, 마음 다잡으며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뿐이니까.
잘 적응하기 위해 안 돌아가는 머리로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긴장 상태로 떨어가며 모르는 곳을 가본다. 역시나 듣기, 말하기가 안되는 상황에 좌절하다가 푸짐한 마라탕 한 그릇에 마음이 녹는다. 중국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가도, 얼굴 맞대고 좁은 테이블에서 이야기할 상상만으로 등에서 땀이 흐른다. 땀 닦고 영양가 없는 글이라도 매일 쓴다. 비싼 국제 배송료가 아깝지 않을 책을 고르고 골라, 주문하고 기다린다. EMS 택배가 언제 올까 기다리는 며칠은 내내 설렌다. 조금씩 달라지는 하루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가도, 왠지 모르게 허한 마음은 이 도시의 밤과 닮은 것 같았다.
화려한 거리를 벗어나자 택시는 서서히 멈추었다. 나는 나무가 우거진 거대한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캄캄한 길 위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은 보이지 않고, 아파트 층마다 노란 불빛이 반짝였다. 행여나 그 불빛이 꺼질까 싶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밤공기가 산들거렸다. 중국의 봄은 이렇게 빨리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