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처음 만난 노령의 바이어는 아들 다섯 딸 셋을 거느린 대가족의 가장이었다. 그의 자식들 사랑은 특히 유별나서 회사의 이름을 자식들의 이니셜을 하나씩 따서 지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여덟 남매는 미국에 거주 중인 딸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함께 일 하고 있었다.
처음 거래를 시작했을 때 우리 회사와 실질적인 업무를 하던 담당자는 여덟 남매 중 첫째 아들이었다. 바이어의 회사에 도착하면 첫째 아들의 안내를 받으며 순회를 돌았다. 우선 큰 책상이 놓인 집무실에서 큰 아들의 통역과 함께 노령의 바이어와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다섯 아들의 사무실을 굳이 하나씩 들려 안부를 주고받고 딸 둘의 사무실에 들려 가벼운 악수를 한 후에야 큰 아들 사무실로 향할 수 있었다.
지금도 순회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십 년째 똑같다. 누가 형이고 동생이고 누나고 언니인지 십 년째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 예전에 소개를 받았지만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에서야 점심식사를 하며 이름과 서열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형제들 모두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동안 바이어 회사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지금 90세 가까이된 노령의 바이어는 알츠하이머 증후군을 앓게돼 일선에서 물러났고, 우리 회사와 연락하던 큰 아들이 사장 자리에 취임했다. 큰 아들을 대신해 우리와 거래하는 역할은 셋째 아들이 맡았다.
그 사이 바이어 회사의 자금 사정이 안 좋아졌다. 4층짜리 건물 두 동을 쓰던 바이어가 건물을 한 동으로 줄인 것이 5년 전쯤 일이고, 올해는 하나 남은 건물마저도 일부를 다른 업체에 임대할 계획이다.
바이어 회사의 자금 사정이 안 좋아진 것이 우리 회사 때문일까? 너무 싸게 들어오는 중국산 물건 때문에 우리 물건이 경쟁력을 너무 많이 잃은 것일까? 무엇보다 우리 회사는 이 바이어로부터 무사히 물건 판 값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는 일곱 남매를 모두 취직시키다 보니 자금을 굴리기도 빠듯했던 것은 아닐까? 향후 2년간 구조조정을 단행한다고 들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도울 수 있나?
바이어와 마주 앉아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지만 먹구름은 여전히 잔뜩 끼어있다.
여기는 산토도밍고, 도미니카 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