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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영 Aug 24. 2019

KIN

산토 도밍고 공항 게이트 A5에서 보딩패스를 제시하자 기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안내직원이 드라이한 표정으로 보딩패스 안에 내 영문 이름 위에 찍힌 SSSS를 가리킨다. 국제선 비행의 경우 항공사에서 랜덤으로 승객들을 지정해 가방 검색을 실시하는데 내가 재수 없이 걸렸다고 했다.

게이트를 벗어나 키 큰 보안팀 직원을 따라 걷다 보니 다시 이민국 사무실을 지나 가방 검색대까지 이르렀다.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으라는 지시를 따르니 어디서 개가 한 마리 나타나 내 가방 냄새를 맡는다.

랜덤 체크 절차를 왜 2시간 전에 안 밟고 하필 막 비행기 타려는 순간에 하냐고 따졌더니, 돌아오는 공항직원의 말은 아주 명쾌했다.

깜빡했네요.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다시 비행기에 탔다. 나는 보통 남미 출장 중에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을 청한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우리 회사 사장님이 호통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륙시간이 한 시간이 지났는데 비행기가 이륙하지 않고 있었다.

비행기 기장의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비행기 기계 결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미니카 공화국 내에서는 고칠 수 있는 부품을 구할 수 없네요. 미안하지만 승객 여러분 모두 소지품을 챙겨 비행기에서 내려주십시오.”

5년 전인가 같은 공항 같은 항공사 비행 때는 한 비행기를 두 번 탔다가 연거푸 다시 내려야 했다. 그때도 기계 결함이었다. 토네이도, 태풍, 눈사태, 안개 등의 천재지변이 아니었다. 기계 결함이 있으면 애초에 티켓팅 조차 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A5 게이트 앞에 항의 행렬이 이어졌다. 승객들은 매우 더디게 다음 비행기 보딩패스를 받아 대기실 자리에 앉았다. 우리 일행은 차례를 기다리며 다른 항공편을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오늘 안에 계획된 다음 행선지로 가는 다른 비행기는 인터넷으로 찾을 수 없었다.

우리 회사에서 ‘출장 간다’는 의미는 많은 부분 ‘간다’에 방점이 찍혀있다. 가는 게 일이다. 오늘 안에 B라는 도시에 가야 내일 C 모레 D 도시에 갈 수 있다. 그래서 출장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ON TIME’이다.

하지만 항공사 직원의 안내를 기다리는 행렬 속에서 인터넷에 자메이카행 비행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안에 자메이카에 도착하지 못하면 내일 자메이카에서 에콰도르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다.

항공사 보상책은 이 더딘 행렬을 기다렸다 추후에 받더라도, 오늘 자메이카행 비행기를 정말 취소하고 여기서 바로 에콰도르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사야 할까? 자메이카 호텔에도 취소한다고 전화해야 하나? 바이어한테는 지금 연락을 취해 오늘 못 갈 것 같다고 말해야 하나? 정말 갑자기 하늘에서 자메이카 가는 비행기 티켓이 뚝 떨어질 수는 없을까?

아무래도 항공사 직원의 안내를 먼저 받는 게 수였다. 기다렸다. 시간은 원래 출발하기로 한 새벽 5시 반에서 두어 시간쯤 지나고 있었다.

그때 항공사 직원이 옛다 이거나 먹어라 하면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공짜로 대령했다. 샌드위치는 과연 이 지구 상에서 경험한 적 없는 맛이었다. 정신을 차려야겠기에 칩이나 우걱우걱 씹어댔다.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자 항공사 직원은 정말 하늘에서 티켓을 뚝 떨어뜨렸다. 어떻게 인터넷에는 안 뜨는 자리가 있을 수 있지? 고민할 시간에 차라리 잠을 청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마이애미를 거쳐 자메이카에 도착했다. 자메이카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선 지 18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고맙게도 바이어는 사정을 봐줘 밤 10시부터 짧은 미팅을 허락했다.

여기는 킹스턴, 자메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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