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 멕시코 가방의 진실 Part 1을 아직 읽으신 분들은 먼저 읽고 오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지난주 포스팅에서 다룬 ‘쓰러지는 군인’ 사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 원본은 종적을 감춘 상황이었다. 각종 전시회나 출판물에 공개된 사진들은 모두 빈티지 인화물의 재복사본일 뿐이었다. 혹시 멕시코 가방 안에서 필름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을까?
잊혔던 로버트 카파의 스페인 내전 필름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카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동생이자 국제사진센터의 설립자인 코넬 카파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 덕분이다. 로버트 카파가 파리에서 일하던 암실의 담당 매니저 임레 바이즈(Imre Weiss)로부터 온 편지였다. 바이즈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파리에 접근해오자, 카파의 필름들을 배낭에 담아 자전거를 타고 보르도(Bordeaux)로 향했다. (필름들을) 멕시코로 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길에서 어느 칠레 사람을 만났고, 그의 영사관에 잘 보관해 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칠레 사람이 이를 받아줬다(참고자료 7: Steve Meltzer, 2013).”
스페인 내전 취재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와 있던 로버트 카파는 히틀러의 독일군이 프랑스를 위협해오자, 그의 암실 매니저 바이즈에게 필름을 맡기고 이미 프랑스를 탈출한 후였다. 카파는 유태인이었던 신분 탓에 더욱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헝가리계 유태인이었던 암실 매니저 바이즈 역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영사관이 안전하다고 판단되어 칠레 사람에게 가방을 넘긴 것으로 보인다.
바이즈는 1975년 뒤늦게 코넬 카파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렸다. 편지를 받은 후 코넬 카파는 영사관을 수소문하지만 무위에 그쳤다. 카파의 필름들은 영사관 근처에도 못 갔던 것일까?
훗날 밝혀진 바로는, 칠레인의 손에 넘겨졌던 필름 가방은 우연히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ambassador) 프란시스코 아길라르 곤살레스(Francisco Aguilar González)에게 건네 졌다. 누가 어떤 경로로 멕시코 대사에게 이 가방을 전달했는지 정확한 경위는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당시 멕시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파시즘 정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비자를 내어준 유이한 나라(다른 한 나라는 구소련으로 알려져 있음)였고, 스페인 프랑코 정권이 내전 당시 히틀러의 지원을 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칠레인의 입장으로는 멕시코 대사관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참고자료 8: Patrick Cockburn, 2013).
카파의 필름 가방은 곤살레스 대사가 다시 멕시코로 이주하면서 함께 멕시코로 옮겨졌다. 곤살레스 대사가 필름의 존재 여부를 실제로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밝혀진 바 없다. 멕시코 가방은 결국 곤살레스 대사의 사망 후 그의 지인의 조카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다행인 건 질소염 부식을 염려했던 전문가들의 걱정과는 달리 아무도 찾지 않아서였을까 70년 가까이 지나도록 필름이 손상됨 없이 잘 보존돼 있었다(참고자료 9: Randy Kennedy, 2009).
안타깝게도 '쓰러지는 군인’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 원본은 가방 속 4500 장이나 되는 필름들 중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멕시코 가방에서 발견된 필름들 중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찍은 다른 앵글의 사진들이 발견되었다.
우선 아래 필름 원본을 결국 찾지 못했다는 첫 번째 사진(‘쓰러지는 군인’)과 멕시코 가방에서 찾았다고 밝혀진 사진들(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자.
매그넘은 위 흑백사진 3점이 모두 세로 무리아노(Cerro Muriano)에서 촬영되었다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홈페이지에 기록하고 있다. 자 이제 흑백 사진 3장과 실제 에스페호(Espejo)(컬러사진)에서 촬영된 사진을 비교해보자.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으로 칠한 뒷배경들을 유심히 비교해보면, ‘쓰러지는 군인’ 사진은 실제로 세로 무리아노가 아닌 에스페호에서 촬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참고자료 10: Caroline Angus Baker, 2016).
여기 ‘쓰러지는 군인’ 사진과 더불어 20세기 전쟁 사진의 원투펀치라 할 수 있는 일명 ‘파도 속 얼굴(the face in the surf)’ 사진이 있다. 로버트 카파가 세계 2차 대전의 터닝포인트가 된 D-DAY 노르망디 상륙 작전 중 찍은 것이다. 처음 알려지기로는 카파가 상륙 작전 중 106장의 필름을 찍었다고 했다. 그런데 암실 직원의 작업 실수로 필름 대부분이 녹아내리고 안타깝게도 11장만 남게 되었고, 운 좋게 남은 11장의 사진만으로도 전쟁의 잔혹함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면에서 일명 ‘위대한 11장(The Magnificent eleven)’이라고 까지 평가받게 된다. 이 사진들은 훗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모티브가 되어주기도 했다.
최근 이 '위대한 11장' 사진에도 석연찮은 반론이 제기됐다.
LIFE 지 D-DAY 상륙작전 보도 당시 포토 에디터 존 모리스(John Morris)의 최초 증언에 따르면, 보통 필름 현상 후 건조 과정에서 건조기 문을 열고 건조하는데, D-DAY 필름들은 보도 마감이 임박하여 건조작업을 빨리 마치기 위해 건조기 문을 닫고 건조를 시키다가 과열돼 필름의 대부분이 녹아내렸다고 했다(참고자료 11: John Morris, p5-7, 2002).
지난 5년간 ‘위대한 11장’을 연구해온 콜먼(A.D. Coleman)이 존 모리스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했다. 콜먼에 따르면 당시 건조기는 필름을 녹아내릴 정도로 과열될 수 없었으며, 보통 건조할 때 젖은 상태의 필름에 먼지가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건조기 문을 열지 않고 꼭 닫고 건조하는 게 정석이라고 한다(참고자료 12: A.D. Coleman, 2019). 건조기 과열로 인해 필름이 녹아내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것.
암실 보조로 일하면서 사진가의 꿈을 키웠다던 로버트 카파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친형인 로버트 카파의 필름들을 현상하며 사진계에 입문했다는 로버트 카파의 동생 코넬 카파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이들 형제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사실을 바로잡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로버트 카파는 어쩌면 106장을 찍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11장 밖에 찍지 않고 LIFE 지 런던 사무실로 필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당시 담당 에디터 존 모리스는 2014년 98세의 나이에 CNN과 가진 TV인터뷰에서 이 부분을 뒤늦게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몇 전문가들이 필름이 녹아내릴 일은 없으며 (아마도 나머지 95장)은 전혀 찍지도 않았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에도 카파가 필름 한 롤만 찍은 것을 미리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필름 4 롤을 한꺼번에 런던 사무실로 보낸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아마도 건조과정에서 녹아 잃어버린 사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참고자료 13: Christiane Amanpour, 2014).”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34년, 헝가리계 유태인 신분으로 프랑스에 살며 수입이 변변치 않았던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edman)은 독일계 유태인 게르타 포호릴레(Gerta Pohorylle)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의 연인 게르타의 권유로 유태인이었던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각자의 이름을 로버트 카파(Robert Capa)와 게르다 타로(Gerda Taro)로 개명(改名)하게 된다.
개명 후 이들 커플은 프랑스 사진 에이전시들을 돌아다니며 '로버트 카파'라는 미국 출신 사진가를 새로 발견했다고 거짓 홍보하고 다녔고, 앙리 프리드만은 '로버트 카파'라는 허구의 이름으로 찍은 사진으로 예전 이름으로 찍을 때보다 수입을 3배는 더 벌어들일 수 있었다(참고자료 14: Sean O'Hagan, 2012).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로버트 카파는 연인 게르다 타로를 만난 시점에 종군사진가로서의 성공을 위한 로드맵을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미스터리한 ‘멕시코 가방’도 드라마 같은 ‘위대한 11장’도 죽어서까지 그의 명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카파가 미리 준비해 둔 기획은 아니었을까? 아직도 종군 기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그가 남긴 명언은 투철한 기자 정신을 의미하는 ‘카파이즘’과 함께 그의 입지전적의 커리어에 방점을 찍어준다.
당신의 사진이 좋지 못하다면, (피사체에)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then you're not close enough.)
에필로그 1:
멕시코 가방이 발견되기 30여 년 전인 1970년대, 스웨덴에서 로버트 카파가 찍은 사진 인화물(필름이 아닌)이 담긴 가방이 발견되었다(참고자료 15: Margot Adler, 2010). ‘멕시코 가방'이 가방이라고 하기엔 작은 상자에 가까웠지만, 스웨덴에서 발견된 전례를 따라 가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배경이다. 혹시 지구 상 어딘가에 로버트 카파가 남긴 또 다른 가방이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필로그 2:
어떤 이들은 로버트 카파와 게르다 타로가 '로버트 카파'라는 가상의 이름을 함께 사용하며 카메라와 사진들을 서로 공유했다고 주장한다(참고자료 16: Rodrigo Terrasa, 2008). 스페인 내전 때 찍은 '쓰러지는 군인' 사진도 사실은 카파가 찍은 것이 아니라 그의 연인 게르다 타로가 찍었다는 설이 나온 이유다. 어쩌면 로버트 카파가 훗날까지 '쓰러지는 군인’ 사진에 대해서 말을 아낀 결정적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 커플은 스페인 내전 때 함께 취재 활동에 나섰고, 게르다 타로는 내전 취재 중 탱크에 치여 안타깝게 사망했다.
에필로그 3:
로버트 카파는 1954년 5월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스페인 내전 취재 중 사망한 그의 연인 게르다 타로의 운명을 따라가고 싶었던 걸까? 사망했을 때 그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고 한다(참고자료 17: Badenbroek, 2016).
한 편, 로버트 카파의 동생이자 국제사진센터 설립자 코넬 카파는 30년이 넘도록 찾아 헤매던 형의 필름 가방을 멕시코로부터 입수하고 1년 뒤인 2008년 90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고 전해진다.
*** 참고자료 번역에 의역 오역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원하시면 링크 원문 참고해주세요. 상기 내용 중 잘못 기술된 부분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충분히 검토 후 수정하겠습니다.
<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두 번째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