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가방의 진실 Part 3
20세기 전쟁 사진의 대표주자 로버트 카파의 숨겨진 이면을 알아본 시간들을 뒤로하고, 멕시코 가방을 마음속 한 구석에 밀어 둘 참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네이션(The Nation) 지 기사 하나를 읽게 됐다.
이미 지난 포스팅에서 카파의 필름 가방은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가 모국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옮겨졌다고 밝힌 바 있다. 네이션 지는 프란시스코 멕시코 대사 부부의 귀국 여정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고 전한다.
"1942년 봄,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 프란시스코 곤살레스는 그의 와이프인 마리아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파시즘 정권의 스페인을 지나 리스본에 도착했고, 리스본에서 와이프인 마리아만 20개의 수하물을 들고 뉴욕행 증기선에 탑승했다. 프란시스코 대사는 (아내를 배웅 후) 다시 스페인을 지나 프랑스를 거쳐 런던으로 향한 후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뉴욕에서 재회한 이들 커플은 수하물을 들고 기차로 미대륙을 통과하여 그들의 고향인 멕시코 시티에 마침내 도착했다(참고 자료 1: Kaufman, 2011)."
1942년 봄은 시기적으로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의 절반을 정복하기 직전이라(참고 자료 2: History.com, 2018), 멕시코 대사 역시 피난길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의문점은 왜 굳이 프란시스코 대사는 리스본까지 가서 부인만 먼저 증기선에 태워 보내고 자신은 런던까지 올라가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일까? 혹시 프란시스코 대사가 필름 가방의 존재를 미리 알고 치밀하게 귀국 여정을 준비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 프란시스코 대사가 지키고 싶었을지도 모를(?) 멕시코 가방을 다시 열어 볼 작정이다. 필름 4500여 장이나 되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기록이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군인' 사진 단 한 장의 논란으로 묻히기에 아까운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존재할 거라는 믿음에서...
멕시코 가방 속 필름들은 로버트 카파 혼자 찍은 것이 아닌, 카파에게 사진을 배운 카파의 연인 게르다 타로, 그리고 카파의 절친이자 동료 사진가 데이비드 시모어(David Seymour)와 함께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4500여 장의 필름을 시간순으로 구분해 보면, 데이비드 시모어, 게르다 타로, 로버트 카파가 각각 내전의 초기, 중기, 말기를 중점적으로 맡아 촬영한 것으로 전해진다).
멕시코 가방 속 사진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밀착 인화본이다. 밀착 인화(contact print)는 한 장의 인화지 위에 여러 장의 필름을 놓고 썸네일식으로 인화해서 필름들을 한눈에 살펴보기 좋은 장점이 있다. 이제 밀착 인화의 왼쪽 하단에 있는 사진을 좀 더 크게 확대해보자.
이 사진은 데이비드 시모어가 1936년 4월에서 5월 사이 스페인 바다호스(Badajos: 지명) 근처 한 토지 개혁 연설 현장을 촬영한 것으로,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군인’ 사진과 함께 스페인 내전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평가받는다.
토지 문제는 스페인 내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농업이 국가 기반 산업이었던 스페인에서 교회와 대지주들이 전체 토지와 재산의 1/3 가량을 장악해 경제 활동 인구의 50% 이상이었던 농민들의 원성만 높아져 갔다(참고자료 3: 네이버 백과사전).
1936년 정권을 잡은 공화국 정부가 농민들에게 그들이 일했던 토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농지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자, 정국은 농민과 지주들 사이 심각한 대립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바다호스(Badajos) 농민들이 문제의 토지에 침입 및 점거하는 운동을 펼치다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고, 같은 해 8월에는 이 곳 바다호스(Badajos)에서 파시즘 세력에 의한 대학살이 벌어졌다(참고자료 4: Badajos massacre).
토지 문제를 염두에 두고 보면 위 사진은 스페인 전쟁의 서막처럼 느껴진다. 정부가 통과시킨 농지 개혁 법안이 빨리 실행되길 바라는 기대감과 가까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농민들 사이로 젖먹이 아이의 모습이 눈에 띈다. 농민들의 미래는 어디로 가고 있던 것일까? 저 젖먹이 아이는 넉 달 후 벌어진 대학살에서 무사할 수 있었을까?
데이비드 시모어. 매그넘 에이전시의 창립 멤버 중 하나.
이 이상 그의 이력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라는 매그넘의 화려한 프런트맨들의 그늘이 너무 길게 드리워져서 일까?
데이비드 시모어의 본명은 Dawid Szymin. 그의 온라인 아카이브에 찾은 폴란드 ID카드에도 본명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데이비드의 이력이 궁금한 이들은 아카이브 방문을 추천한다. 그가 쓰던 각종 ID카드는 물론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그가 쓰던 카메라 목록까지 찾아볼 수 있다).
친한 친구끼리 닮아간다고 했던가? 그의 인생은 여러모로 그의 절친 로버트 카파와 닮아있다.
첫째, 로버트 카파와 태어난 국적은 다르지만 둘 다 유태인계다(로버트 카파: 헝가리계 유태인, 데이비드 시모어: 폴란드계 유태인).
둘째, 데이비드 시모어도 카파처럼 유태인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개명(改名)했다. 프랑스에서 활동 당시 그의 이름은 Chim. 자신의 성 Szymin에서 따온 것으로 발음은 '쉼'으로 읽는다(이하 이름 표기는 편의상 쉼(Chim)으로 함). 훗날,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시모어(Seymour)로 다시 한번 개명했다.
셋째, 두 사진가 모두 전쟁 취재 중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로버트 카파가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지뢰를 밟아 42세에 사망했고, 쉼(Chim)은 2년 후인 1956년 제2차 중동 전쟁 취재 중 기관총 사격에 맞아 45세에 사망했다.
쉼(Chim)의 스페인 내전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공화국 정부는 지주들과 손잡고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교회에 적대적인 입장이었고, 교회 역시 프랑코의 파시즘 세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쉼(Chim)의 사진을 보면 교회에 나쁜 감정만 가질 것 같은 공화국 정부군이 오히려 미사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세상의 편견과 맞서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내전 기간 동안 공화국 정부군이 실제로 각종 문화재를 포함한 2만여 개 교회를 파괴하고 불태웠다는 기록이 존재하지만(참고자료 5: Spanish Civil War), 쉼(Chim)은 공화국 정부군 병사들이 교회 문화재 복구에 힘을 쏟는 사진을 통해 또 한 번 세상 사람들의 편견에 반기를 든다.
'쉼의 전쟁의 아이들(Chim's Children of War)'의 저자이자 역사학자 케롤 네이거(Carole Nagger)는 로버트 카파와 쉼(Chim)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는다.
"카파는 액션 사진에 좀 더 관심이 많았다. 쉼(Chim)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전쟁 중에도 어떻게 삶이 계속되는지를 탐구했다. 카파가 프런트맨이었다면 쉼(Chim)의 관심은 전쟁 이면(behind the scenes)에 있었다(참고자료 6: Abrams, 2013).”
케롤 네이거는 데이비드 시모어가 로버트 카파보다 훨씬 사려 깊고 분석적이라고 평한다. 쉼(Chim)은 스페인 내전이 민간인을 타깃으로 한 최초의 대규모 물리적 갈등이라는 인식 속에 전쟁이 일상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참고자료 7: Nagger, 2013). 특히 총성이 오가는 전쟁의 공포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눈에 띈다. 범퍼카를 타고 있는 커플의 표정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저들은 전쟁의 공포를 잘 이겨내고 있던 걸까?
쉼(Chim)이 내전 기간 중 바르셀로나에서 찍은 수영복 차림의 여성들과 공화국 정부군의 모습. 바르셀로나는 당시 폭탄과 대공포탄 파편의 위협 때문에 해수욕장 출입이 금기시되고 있었음에도 젊은 혈기는 꺾지 못했나 보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바르셀로나의 한 나이트클럽의 모습이다. 손님들에게는 음료가 제공됐다고 한다. 희미하지만 내일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모여드는 테이블 주변 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쉼(Chim)을 가리켜 '철학자 혹은 체스 플레이어'라고 불렀다. 뉴욕 브루클린 출신 작가 댄 카우프만(Dan Kaufman)은 이점이 쉼(Chim)으로 하여금 혼란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고요함을 찍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한다(참고자료 8: Kaufman, 2011). 쉼(Chim)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촬영한 낚싯줄을 고치고 있는 낚시군들의 고즈넉한 모습도 카우프만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쉼(Chim)이 스페인 기혼(Gijón)에서 촬영한 폐허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멕시코 가방 사진들 속에서 찾아낸 또 다른 ‘혼란 속 예상치 못한 고요함’이라 할 수 있겠다.
바르셀로나의 한 탄약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 참전 중인 남성 공장 근로자들을 대신해 여성근로자들이 공장에서 포탄을 조립하고 있다. 쉼(Chim)은 전쟁 기간 중 남자들을 대신해 현장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틈틈이 담아냈다.
스페인 동쪽 해변의 작은 섬 메노르카(Menorca). 이 곳은 내전 기간 중 공화국 정부군을 지지한 유일한 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지상전은 없었으나, 프랑코를 지지하던 이탈리아 공군의 공습이 잦았다고 알려져 있다(참고 자료 9: Menorca). 공습을 피해 지하 피난처로 대피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내 개인적으로 쉼(Chim)이 찍은 스페인 내전 사진들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 최후의 엑소더스. 1939년 내전에서 패배하자 무기를 버리고 자욱한 안갯속 국경을 넘어 프랑스 르 뻬흑듀(Le Perthus)로 피난 가는 공화국 정부군 모습이다.
로버트 카파와 닮은 듯한 인생 궤적을 그리고 있지만, 쉼(Chim)은 카파처럼 매력적인 데어데블은 아니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쉼(Chim)의 사진에는 브레송처럼 화려한 기하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카파나 브레송의 작품보다 훨씬 더 생각에 잠기게 하는 철학이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카파의 일명 ‘쓰러지는 군인’ 사진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을 때, 쉼(Chim)의 사진은 카파에게 조용히 되묻고 있지 않았을까? 전장의 최전선에서 총성이 오가는 결투 장면만이 종군 사진의 전부는 아니라고.
*** 스페인 내전 사진만 소개해 드리기에 쉼(Chim)의 다른 좋은 사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 주에 또 다른 사진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세 번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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