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두영 Jun 09. 2019

데이비드 시모어: 매그넘의 언성 히어로 Part 2

<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 FDC  Lagency  Taste (Paris)  Ingrid Bergman © David Seymour  Estate of David Seymour-Magnum Photo

2015년 제68회 칸 영화제 포스터에는 영화 <카사블랑카>로 유명한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가 포스터 모델로 선정된 배경으로는 영화산업에 기여한 공로도 한몫하겠지만 무엇보다 2015년이 그녀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칸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저 포스터 속 사진을 찍은 원작자를 알아보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게 됐다. 바로 지난주에 소개한 데이비드 시모어(David Seymour)가 이 사진을 찍은 원작자였던 것.


© Collection Capa/Magnum Photos

여기서 잠깐. 잉그리드 버그만은 한때 로버트 카파의 연인이었다. 둘의 만남이 처음 이뤄진 건 2차 세계대전이 막판으로 치닫던 때로 돌아간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미국위문협회와 함께 떠난 유럽 순회공연 중 머물던 파리의 한 호텔 방에 한 장의 메모가 도착했다. 로버트 카파와 그의 친구이자 소설가 어윈 쇼가 함께 작성한 메모였다.




주제: 1945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 저녁식사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1. 이것은 일종의 공동체 활동의 일환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은 로버트 카파와 어윈 쇼입니다.

2. 우리는 오늘 밤 당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 위해 이 메모와 꽃다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얼마 없어서 상의 끝에 꽃을 사던지 저녁을 사던지 둘 중 하나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둘 다 준비할 여력은 안되네요). 우리는 투표를 했고 저녁 식사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겼습니다.

3. 만약 당신이 저녁 식사가 별로라면, 꽃을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꽃배달이 괜찮은 방법인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4. 게다가 꽃이 과연 싱싱한지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

5. 우리 매력이 한정적이라 이 메모를 더 길게 쓴다면 만나서 할 얘기가 없을 겁니다.

6. 6시 15분에 전화하겠습니다.

7. 우리는 잠들지 않습니다. 좀 걱정됩니다만.

(참고 자료 1: Carter 2016)




메모를 받아 든 잉그리드 버그만은 그전까지 일면식도 없던 수상한 남자 두 명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게 된다. 이날 처음 본 순간부터 잉그리드 버그만은 로버트 카파가 맘에 들었다고 한다. 잠시지만 잉그리드 버그만이 로버트 카파에게 할리우드에서 일자리까지 알아봐 주며 함께 지낸 걸로 보아, 이 매그넘 프런트맨에 대한 은막의 여왕의 마음은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심지어 카파에게 먼저 청혼까지 했지만 카파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신문 기자(newspaper man)다. 혼자서 외로운 호텔에서 지내는 게 좋다(참고 자료 2: Sullivan 2017).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외로운 남자 로버트 카파가 그의 절친 데이비드 시모어를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소개해줬을까? 웬일인지 매그넘의 홈페이지에는 카파 보다 시모어가 찍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을 훨씬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David Seymour/Magnum Photos

메릴랜드 대학 수석 큐레이터인 톰 벡(Tom Beck)은 위 사진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버그만의 쌍둥이 딸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들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둘러 쌓여 있었다. 하지만 쌍둥이 딸들을 촬영할 수 있었던 사람은 데이비드 시모어 한 명뿐이었다.”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저널리스트 수잔 스탬버그(Susan Starmberg)는 위 사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햇살이 드리운 정원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아들 중 한 명과 함께 있었다. 그녀는 바지 차림에 녹색 폴로티를 입고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비둘기가 그녀의 어깨 위에 막 내려앉았다. 그녀는 영화계 별이라기보다 그저 친구의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한 명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데이비드 시모어를 신뢰했다.”


메릴랜드 대학 수석 큐레이터 톰 벡은 많은 이들이 데이비드 시모어를 신뢰했다고 전한다.

"시모어는 언어에 능통해서(4개 국어 가능)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고 공통된 관심사를 이끌어 냈다(참고 자료 3: Montagne, 2006)."



1947년 미국 This Week 지가 시모어의 유럽 취재를 위한 여행서류를 준비시키는 서신 내용

1947년 미국 잡지 This Week 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식 2주년 기념 보도를 위해 데이비드 시모어를 유럽으로 급파했다. 탐사보도 프로젝트 ‘We went back’의 일환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부터 베를린으로 이어졌던 연합군의 진격로를 그대로 따라가며 전쟁의 상흔(傷痕)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 David Seymour/Magnum Photos

‘We went back’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 로버트 카파가 총성이 오가던 D-Day 상륙작전을 찍은 바로 그곳에서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고 있다. 역사학자 캐롤 네이거(Carole Nagger)는 이 사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아이들 위로 뒤집힌 상륙정(landing craft)이 거대한 고래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뒤집힌 상륙정은 푸른 하늘과 노란 모래사장을 반으로 가르고 아이들 위로 전쟁의 그림자를 드리운다(참고 자료 4: Nagger 2018)."



© David Seymour/Magnum Photos

데이비드 시모어가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서 찍은 다른 연작 사진들을 보면, 그가 저 아이들과 함께 모래성을 쌓아 올리기라도 하듯 꽤 오랜 시간 저들과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모어는 아이들을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 밖으로 이끌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시모어의 조카이자 그의 유산 집행인인 벤 슈나이더만(Ben Shneiderman)은 시모어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당신이 쉼(Chim)의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찍히기 3분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스스로 물어본다면, 아마도 대부분 그가 피사체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는 피사체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멀리서 찍지도 어깨너머로 찍지도 않았다. 그는 피사체와 함께 있었고, 그들과 감성적인 친분을 쌓았다(참고 자료 5: Montagna 2006)."



© David Seymour/Magnum Photos



© David Seymour/Magnum Photos

흑백 필름으로 담은 다른 앵글의 사진. 컬러사진보다 상륙정의 그림자 암부가 더 어둡게 표현되서인지 컬러 사진보다 좀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 David Seymour/Magnum Photos

1947년 노르망디에서 얼룩소의 젖을 짜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다. 미국군이 버리고 간 군복을 입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데이비드 시모어가 계속 다뤄오던 주제인 인간은 어떻게 전쟁에 적응해가는가에 대한 사진으로 해석된다. 전쟁은 끝나고 삶은 계속된다.  



© David Seymour/Magnum Photos

프랑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을 지나 도착한 네덜란드 네이메헌(Nijmegen: 지명). 역사학자 캐롤 네이거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 지역 거주민의 1/4 가량에 해당하는 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전시 중 파괴된 건물들의 복구작업은 더디지만 삶은 계속된다(참고자료 6: Nagger 2018).



© David Seymour/Magnum Photos

네덜란드를 지나 'We went back' 프로젝트의 마지막 여정지인 독일 베를린으로 향하는 길목인 에센(Essen:지명)에서 찍은 사진이다. 검게 그을린 폐허 속 건물들 앞으로 유모차를 탄 한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 매그넘 홈페이지에 사진 캡션은 이 아기를 "어느 영국 군인의 사생아"라고 설명한다.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나도록 저 아기가 영국군 아버지를 따라 모국으로 가지 못하고 독일에 남은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영국군이었던 아버지는 전쟁 중 사망한 것일까? 저 아기 엄마는 누구인가? 열심히 자료 조사를 해봤지만 사진 캡션 외에 저 아기의 신원을 확인해주는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 David Seymour/Magnum Photos

마침내 도착한 독일 베를린의 모습. 뒤쪽에 보이는 건축물은 나치가 정권을 잡았을 때 나치당(Nazi party)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이다. 이 문의 가장 꼭대기 부분에 원래 위치해 있어야 할 4마리 말이 이끄는 승리의 여신이 탄 마차가 전시 폭격에 의해 유실된 모습은 패전국 독일을 상징처럼 보여준다. 그 앞을 지나가는 한 남자와 그의 자녀들의 모습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보는 데이비드 시모어 자신의 그림자가 꽤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위키피디아에서 다운로드한 브란덴부르크 문의 모습. 문의 상단을 비교하면 시모어의 사진에 유실된 부분을 짐작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은 2012년에 찍은 브란덴부르크 문의 모습이다. 참고로 1956년 복구된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 분단 시절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후 동서독을 오가는 유일한 통로로도 알려져 있었던 만큼 지금까지도 독일인들에게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건축물로 남아있다(참고 자료 7: 네이버 지식백과).



데이비드 시모어는 'We went back' 프로젝트를 마치고 돌아온 1947년 말 그의 친구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과 함께 매그넘 에이전시를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이제 막 창설된 유니세프(UNICEF)로 부터 세계 대전 후 전쟁고아로 남은 유럽의 아이들에 대한 취재 요청을 받게 되는데...


사진이 취향이 되는 시간 <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네 번째 이야기 끝



*** 데이비드 시모어를 3주 분량으로 소개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의 사진이 제 개인적으로는 워낙 좋아서 한주 더 할애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사진들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사실 직장 다니면서 1주일에 한편씩 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다음 주 포스팅까지 올리고 난 후에는 2주에 한편씩 업로드를 목표로 수정할 생각입니다.

*** 참고자료 번역에 의역 오역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원하시면 링크 원문 참고해주세요. 상기 내용 중 잘못 기술된 부분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충분히 검토 후 수정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데이비드 시모어: 매그넘의 언성 히어로 Part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