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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영 Jun 23. 2019

데이비드 시모어: 매그넘의 언성 히어로 Part 3

<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그들의 역사는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서 시작되었다.



비에브르 하천이 흐르던 파리의 모습

프랑스 파리의 몽파르나스는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파리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였다.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몽파르나스 지역 주민들을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 속 가난한 사람들의 모델로 삼은 이유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 지역을 따라 흐르던 비에브르(Bièvre) 하천에서 유출된 산업폐수 탓에 몽파르나스는 파리에서 가장 악취가 심한 동네였다(참고자료 1: 네이버 백과사전).


1875년 파리 시장 오스만 남작이 악취 나는 비에브르 하천 폐쇄 결정을 내리고 이 지역 재개발에 힘을 쏟아 봤지만(참고자료 2: Crossman, 2013) 오랫동안 이어져온 가난한 지역 이미지를 쉽게 바꾸지는 못했다. 프랑스인들이 여전히 몽파르나스를 기피하고 있을 때, 부동산 가격이 저렴했던 이 곳에 모여들기 시작한 이들이 바로 가난한 외국인, 특히 고정 소득이 없는 예술가들이었다(참고자료 3: 노승림, 2018).


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파리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른바 '광란의 20년대(Les Années folles)'라 불리던 파리의 전성시대의 중심에 그전까지 가난한 동네로 터부시 되던 몽파르나스가 있었고, 이 황금기를 주도했던 주인공들 역시 프랑스인들이 아닌 앞서 언급한 몽파르나스의 가난한 이방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왜 하필 '광란의 20년대'의 중심이 프랑스 파리여야 했을까? 그것도 파리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몽파르나스여야 했을까? 음악평론가 노승림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저널리스트이자 영화제작자인 존 백스터는 이처럼 세계 대전 사이에 파리가 누린 전성기를 ‘공식을 알 수 없는 과학적 현상’이라고 일컬었다. 전 세계 유명 예술가와 작가들이 모여들어 자신들의 예술을 서로 교접하고, 뭉치고, 분열시키며 또 다른 하이브리드를 생산해냈지만 이들이 왜 하필 파리에 모여들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서로 결합했는지는 규칙을 찾기 힘들었다(참고자료 4: 노승림, 2018)".


2015년 촬영한 르 돔 카페 전경 ©Petr Kovalenkov/123RF.COM

몽파르나스에 위치한 르 돔 카페(Le Dôme Café). 1898년 오픈하여 지금까지도 성업 중인 이 지역 최초의 카페인데, ‘광란의 20년대'를 보내던 시기에는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는 가난한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어 전 세계 지식인과 문화 예술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던 핫플레이스로 통했다.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소설 <노인과 바다>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 <북회귀선>의 헨리 밀러,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 인상파 화가 폴 고갱 등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인사들이 이 곳을 찾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프랑스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1930년대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르 돔 카페

1934년 쉼(Chim)이라 불리던 파리의 이방인 데이비드 시모어가 또 다른 이방인 로버트 카파를 처음 만난 장소도 르 돔 카페다. 그리고 머지않아 시모어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카파에게 소개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참고 자료 5: Kershaw 2002).


그들의 역사적인 삼자대면이 성사된 1934년은 ‘광란의 20년대’를 지나 세계 대공황으로 접어든 시점이었지만, 몽파르나스의 르 돔 카페는 여전히 유명 명소로 남아 있었다(파리가 누리던 전성기를 1920년대로 한정 짓지 않고 두 세계 대전 사이 20여 년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번 포스팅에서 특별히 논하지 않기로 한다).


로버트 카파의 전기(傳記)를 쓴 리쳐드 웰런(Richard Whelan)은 매그넘의 전설 삼인방이 즐겨 찾던 르 돔 카페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세 사람 모두 ‘광란의 20년대’ 못지않은 ‘광란의 20대’를 보내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26세, 데이비드 시모어 23세, 로버트 카파 21세).

"이들 셋이 르 돔 카페에 함께 앉아 있으면 사진 얘기는 - 사진 기술이나 미학에 대한 것은 더더욱 - 하지 않았다. 카파는 대게 데이트 중이거나 관심 가는 여인에 대해 얘기하길 좋아했다. 혹시 사진 얘기를 하게 될 경우, 스토리 구상이나 에디터들과의 계약 혹은 돈벌이 등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쉼(Chim)은 정기적인 수입이 있었지만 액수가 적었고, 로버트 카파는 사실상 아예 수입이 없었으며, 자존심과 정치적 신념의 사나이 브레송은 부유했던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길 원했다. 이들 셋이 가장 선호하는 대화 주제는 (사진보다는) 정치였다(참고 자료 6: Whelan, p58, 1985).”



아니 어쩌면 그들의 역사는 파리 시내 어느 버스 안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르겠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쓴 첫 번째 라이카 카메라

데이비드 시모어와 로버트 카파의 첫 만남이 르 돔 카페에서 이뤄졌다면, 데이비드 시모어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첫 만남은 흥미롭게도 파리 시내 어느 버스 안에서 이뤄졌다. 당시 시모어는 낯선 사람의 목에 걸려 있던 생전 처음 보는 라이카(Leica) 카메라에 마음을 빼앗겼다(참고 자료 7: Christies.com, 2016). 라이카 카메라가 시모어와 브레송을 만나게 한 가교 역할(?)을 한 샘이다.


1938년 프랑스 파리에서 악수하는 시모어와 브레송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1998년 역사학자 케롤 네이거와 가진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시모어를 회상했다(참고 자료 8: Interview made in Paris, January 14, 1998).

“쉼(Chim)은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세상의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다녔다. 로버트 카파가 친한 동료였다면, 쉼(Chim)은 친한 친구였다(Capa was a pal, but Chim was a friend).”


브레송은 인터뷰 중 시모어가 로버트 카파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사람들은 항상 매그넘 성공의 공로를 로버트 카파에게 돌린다. 하지만 에이전시가 설립된 초창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쉼(Chim)이다. 그가 만든 매그넘의 내규(bylaws)가 없었다면 우리는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왼쪽부터) 로버트 카파, 피에르 가스만 그리고 에른스트 하스 © Magnum Collection/Magnum Photos

매그넘 작가들의 필름 현상 인화를 전담하던 피에르 가스만(Pierre Gassman)도 데이비드 시모어의 역할에 대해 의미 심장한 얘기를 들려준다.

"로버트 카파의 매그넘 설립 계획은 쉼(Chim)이 먼저 동의한 후에야 다른 회원들도 이에 응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프런트맨이었던 로버트 카파가 에디터들과 친분을 쌓고 전후(戰後) 인맥을 넓히기 위해 돈벌이가 될만한 곳은 어디든 뛰어다녔다면, 위험요소들을 좀 더 냉정히 판단하고 에이전시를 본궤도에 안착시킨 건 쉼(Chim)이었다(참고 자료 9: Kershaw, 2002)."


매그넘 창립 회원들 중 아프리카를 전담했던 조지 로저의 모습 © George Rodger/Magnum Photos

매그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조지 로저(George Rodger) 역시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그넘 회장이었던 로버트 카파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데이비드 시모어뿐이라고 얘기한다(참고 자료 10: 브레송에게 보낸 편지, 1956).

"쉼(Chim)은 우리의 재정적 사업적 이해관계들을 관리하고 카파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야망을 보이는 것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쉼(Chim)에게 초월적 회장직 권한을 부여하여 그가 카파를 견제할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물론 내가 카파를 불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그의 진실성을 믿는다. 다만 그의 판단에 확신이 안 선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데이비드 시모어가 매그넘 내 차지하던 비중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였을까. 로버트 카파가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사망했을 때, 그를 이어 매그넘 회장직에 오른 건 데이비드 시모어였다.

 




© Elliott Erwitt/Magnum Photos

데이비드 시모어는 1911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한 유명 유태인계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원래 피아니스트였지만 스스로 절대음감이 아님을 깨닫고 포기한다. 이어 아버지의 기대 속에 가족 사업의 대를 잇기 위해 독일에서 인쇄술과 그래픽 아트까지 전공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프랑스 소르본 대학 유학길에 오른다.


안타깝게도 프랑스 유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유학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폴란드 전역을 강타한 반유대주의(anti-Semicism)의 여파로 부모님의 출판 사업이 악화일로를 걷게 되자, 부모님이 매달 보내주던 생활비가 끊겼기 때문이다. 이때 시모어는 모국으로 복귀하는 대신 프랑스 잔류를 선택하고 생활비를 벌어볼 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사진을 찍어본 경험이 전무하던 시모어는 작은 사진 에이전시를 운영하던 지인이 빌려준 35mm 카메라로 거리에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진으로 담아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카메라를 빌려준 지인의 눈에 띄어 신문과 잡지 등에 팔리기 시작했고, 활동한 지 1년 만인 1934년에 시모어는 프랑스 주간지 Regards 지의 특집 기사 바이라인(신문, 잡지 등의 기사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첫 번째 영광을 누리게 된다(참고 자료 11: Miller, 1997). 시모어가 카파와 브레송과 함께 만난 르 돔 카페에서의 삼자대면도 이 즈음의 일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데이비드 시모어 © Chim Archive

데이비드 시모어가 스페인 내전 취재를 마치고 멕시코를 거쳐 미국에 정착하자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그는 미국 육군에 징집되고 이를 계기로 미국으로 귀화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이름을 Dawid Szymin에서 David Seymour로 개명하게 된다.


개명 이유로는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이 (유태인식 이름 때문에) 미국으로 귀화한 자신과 아직 폴란드에 남아있는 자신의 부모와의 관계를 눈치채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참고 자료 12: Feinstein, 2018).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시모어는 폴란드에 거주 중이던 그의 부모님이 독일이 일으킨 유태인 대학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부모님의 안전을 위해 개명까지 한 그의 노력도 무위에 그친 것이다. 이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데이비드 시모어는 전쟁이 만들어낸 유랑자와 망명자, 전쟁고아, 그 밖에 무장 갈등으로 위험에 빠진 모든 이들에게 꾸준한 관심을 갖는 사진가로 거듭나게 된다.





UNICEF가 시모어의 통행 허가증을 요청하는 전보(電報) 내용 © Chim Archive

1946년 설립된 유엔아동기금(UNICEF)은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전쟁고아가 되거나, 난민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지체장애를 입게 된 1300만 명의 유럽의 아이들을 취재하기 위해 데이비드 시모어를 특별 자문위원(special consultant)으로 고용한다. 데이비드 시모어가 UNICEF가 고용한 역사상 첫 번째 사진가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역사학자 케롤 네이거는 <유럽의 아이들(Children of Europe)>로 알려진 이 프로젝트의 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UNICEF 프로젝트를 위해 시모어는 유럽 내 5개국(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그리스, 폴란드)을 방문하여 총 257 롤의 필름을 찍었다. 보통 하루 수당으로 100불씩 받던 시모어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6개월간 총 2600불만 받고 흔쾌히 작업에 임했다(참고 자료 13: Carole Nagger, 2013).”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유럽의 아이들> 프로젝트 중 첫 번째로 소개할 사진은 시모어가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어느 지체장애아들을 위한 보호시설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언뜻 보면 이 사진은 어느 평범한 소년이 책장에 고개를 떨구고 깜빡 잠든 나른한 오후 풍경처럼 보이지만, 매그넘이 공개한 캡션과 함께 보면 완전히 다른 사진이 된다.


"전쟁 중 팔을 잃은 시각 장애 소년이 입술로 책 읽은 법을 배워 왔다(Blind boy who lost his arms during the war has learnt to read with his lips.)"


캡션은 소년이 전쟁 중에 팔을 잃었다고 설명하지만, 막상 사진은 소년이 팔을 잃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캡션은 또한 소년이 앞을 못 본다고 설명하지만, 막상 사진은 소년이 시각장애가 있는지 확실히 묘사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 사진의 앵글은 소년이 오로지 입술로 점자(braille, 點字)를 읽는 행위에만 집중한다. 마치 과거 전쟁의 상처는 모두 털어버리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이 소년을 독려라도 하듯이.

 

© David Seymour/Magnum Photos

한쪽에서 소년이 점자를 읽고 있을 때, 같은 시설의 다른 한쪽에서는 재밌는 공놀이 현장이 펼쳐진다. 작가는 이 사진을 일부러 해를 마주하고 역광으로 찍었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에서 역광 촬영은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의 시선이 공놀이 하는 행위 자체에 먼저 머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제 시선을 돌려 어둡게 찍힌 아이들을 한 명씩 천천히 들여다보면 이들 대부분이 팔다리를 잃은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앞서 살펴본 점자를 읽는 소년 사진이 전쟁의 아픔을 앵글 밖으로 들어냈다면, 이 사진은 역광을 이용해 숨겨놓는다. 작가는 역광의 그늘 안에 숨겨놓은 전쟁의 아픔보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공놀이를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시모어가 이탈리아 로마를 지나 나폴리에서 만난 담배 파는 소녀 안젤라. 매그넘 홈페이지 부연 설명에 따르면 안젤라는 법정 가격이 한 갑에 350리라 하는 담배를 암시장에서 받아와 250리라씩 받고 팔고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독점으로 운영되는 법정 담배 가격보다 싸게 팔고 있는 로마의 암시장 담배상들을 기소했지만, 안젤라 같은 나폴리의 암시장 판매상들은 아직 공개적으로 장사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시모어가 <유럽의 아이들> 프로젝트 촬영 후 발간한 동명 타이틀 사진책의 서두에는 그가 아이들의 시점에서 직접 작성한 <어른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a grown-up)>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 담배 파는 소녀에 대해 남긴 시모어의 말은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

"소녀들은 대부분 담배를 팔거나 성매매를 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 길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당신들 어른들 대부분이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참고 자료 14: Carole Nagger, 2013)."      


헝가리 하이두핫하자(Haiduhadhaza)에 위치했던 ‘아이들 마을’ © David Seymour/Magnum Photos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버려진 아이들에게 최선의 선택은 새로운 부모님을 찾아 입양되는 경우였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아원에 남게 됐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일명 ‘아이들 마을(Children’s village)’라고 불리던 프로젝트였는데, 어른들이 전쟁으로 어지럽혀 놓은 세상에서 전쟁고아로 남느니 차라리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마을을 직접 건설하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데이비드 시모어의 <어른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전후 유럽 5개국(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헝가리, 네덜란드)에 실제로 존재했던 ‘아이들 마을’이 어떻게 운영됐는지 엿볼 수 있다(참고자료 15: Seymour, 1949).


"이 공화국의 자유로운 시민들(아이들)은 그들이 거주할 오두막을 직접 만들고 가꾼다. 마을 입출입은 자유로우며 혹시 마을을 이탈해도 이에 대한 형벌은 없다. 이탈한 후 다시 돌아와도 자기 자리를 되찾으면 그만이다. 정례(fixed rules)는 따로 없으며 현행법은 아이들이 직접 만들고 자주 바꿀 수 있다. 전쟁 중 유랑 시기에 리더를 맡았던 아이들이 주로 관리자 역할을 맡고 시장과 부서장들은 무기명 투표로 선출된다."


헝가리 ‘아이들 마을’에서 전적으로 아이들만 참여했던 무기명 투표 현장 © David Seymour/Magnum Photos


데이비드 시모어가 방문한 헝가리 하이두핫하자(Hajduhadhaza) 역시 '아이들 마을' 프로젝트가 펼쳐졌던 장소다. 아이들은 고립되어 지내던 삶을 청산하고 이전에 어른들이 도맡았던 생활전선에 자발적으로 나서서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들 마을'에서 토지를 직접 경작 중인 아이들© David Seymour/Magnum Photos

 



'아이들 마을'에 기차 매표소에서 일하는 소녀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아이들 마을'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는 소년의 모습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아이들 마을'에서 발간되던 '아이들 신문' 인쇄소 현장 © David Seymour/Magnum Photos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이 곳은 헝가리 쎄곳(Szegod)이라는 지역의 어느 중학교 실험실 현장. 전쟁의 여파로 비커 등의 실험실 물자가 턱없이 부족해 실험 도구로 전구와 잉크병을 사용해야 했던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사진인데, 부족한 실험 물자도 아이들의 실험을 향한 열의는 막지 못했다.

 


폴란드 바르샤바 1948 © David Seymour/Magnum Photos

데이비드 시모어가 <Children of Europe> 프로젝트를 위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자신의 고향 폴란드 바르샤바다. 부모님이 독일군에 의해 생을 마감했음을 뒤늦게 전해 듣고 다시 찾은 고향은 시모어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었을까? 시모어가 조감도(Bird's eye view)로 촬영한 그의 고향은 멀리 보이는 교회를 제외하고 모두 폐허로 남아 있었다.



© David Seymour/Magnum Photos

데이비드 시모어가 이번 여정길에 바르샤바의 한 지적 장애아들을 위한 보호시설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이 소녀의 이름은 테레스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교실 아이들에게 칠판에 자신의 집을 그려보라고 하자, 테레스카는 혼란스러운 낙서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 집의 존재는 그저 혼란스러움 뿐이었을까. 이 사진이 LIFE 지에 처음 공개됐을 때, 사진 캡션을 그대로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아이들의 상처는 항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수년간의 슬픔으로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들은 치유하기 위해 수년이 걸릴 것이다(참고 자료 16: Nagger, 2017)."

이 사진은 LIFE 지에 공개된 이후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기획한 <인간 가족(The Family of Men)> 전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면서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군인(The falling soldier)>사진과 함께 20세기 가장 위대한 전쟁사진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


만약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군인> 사진과 데이비드 시모어의 <집을 그리는 테레스카> 사진 중 20세기 단 한 장의 전쟁사진을 고르라고 한다면 어떤 사진을 고르겠는가? <쓰러지는 군인> 사진이 조작설에 휩싸였던 것을 논외로 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집을 그리는 테레스카>가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모어의 사진에 대한 철학이 카파의 그것보다 훨씬 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시모어의 조카이자 유산 집행인인 벤 쉬나이더맨(Ben Shneiderman)은 시모어의 사진에 대한 철학이 로버트 카파의 그것과 다른 점을 카파의 명언에 빗대어 설명했다(참고 자료 17: Feinstein, 2018).

"로버트 카파는 '당신의 사진이 훌륭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피사체에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아마 삼촌이라면 '충분히'라는 단어 앞에 '정서적으로(emotionally)'라는 단어를 덧붙였을 것이다."


시모어가 테레스카의 같은 반 친구들을 찍은 사진들도 아래 공유해본다. 테레스카가 그린 집과는 상반되는 집을 그리고 있어서 또 한 번 진한 여운을 남긴다.


© David Seymour/Magnum Photos



© David Seymour/Magnum Photos



© David Seymour/Magnum Photos





지난 3부작 포스팅으로 소개한 데이비드 시모어의 사진들이 여러분 모두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궁금해진다. 그의 사진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상평은 그의 절친이었던 카르티에 브레송이 남긴 말로 대신할까 한다.


시모어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년 되던 해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 남긴 말이다.

"쉼(Chim)이 카메라를 들 때면 마치 의사가 왕진 가방 속에서 청진기를 꺼내 (환자의) 심장 상태를 진단하는 것 같았다. 막상 그 자신의 것은 유약했다(참고 자료 18: Bresson, 1966)."



1956년 사망한 해에 사진작가 엘리엇 어윗의 아들과 유희를 즐기고 있는 데이비드 시모어의 모습 © Elliott Erwitt/Magnum Photo

유럽의 아이들을 사랑했던 남자 데이비드 시모어. 그러나 그 자신은 슬하에 자녀 없이 독신으로 살다가 46세 이른 나이에 이집트 전쟁 취재 중 기관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탈리아 화가 카를로 레비가 그린 시모어의 모습 © Chim Archive

마지막으로 매그넘의 소리 없는 영웅 데이비드 시모어가 남긴 말을 인용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친다. 마치 청진기를 들고 있는 의사 같았다는 브레송의 말이 무색하게 시모어가 남긴 말은 참 겸손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뿐이다: 약간의 운과 셔터를 누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근육(참고자료 19: Smyth, 2018)"





사진이 취향이 되는 시간 <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다섯 번째 이야기 끝



***

평소에 알고 싶었거나 다뤘으면 하는 사진작가분들 있으시면 아래 댓글 달아주세요. 이 지구 상에 모든 사진작가를 소개해드리는 그날까지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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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만 바쁜 회사 일정이 잡혀서 당분간 격주 포스팅도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ㅠㅠ 느닷없는 어느 일요일, 좋은 사진을 찍는 좋은 사진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참고자료 번역에 의역 오역 존재합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원하시면 링크 원문 참고해주세요. 상기 내용 중 잘못 기술된 부분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충분히 검토 후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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