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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영 Jul 28. 2019

신선회(新線會)를 아시나요?

<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이런 회가 생기는데, 거기 같이 가입해서 사진을 해 볼 생각이 없는가?


대한민국 1세대 사진작가로 알려진 정범태는 1955년 남대문 자유 백화점에서 재밌는 제안을 받게 된다. 올해 92세가 된 정범태의 시곗바늘을 1955년 그의 28세 시절로 되돌려보자.

“나는 그 당시에 아마추어로서 군대에서 문관이나 군속 생활을 하고, ‘지금 앞으로 내 진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한데 ‘사진으로 정해야겠다... 그런데 사진을 내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만이 내가 하고자 하는 사진을 할 수 있느냐?’ 그래서 나 또한 신선회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네댓 명은 정범태처럼 자유 백화점 소개로 찾아왔다고 했다. 최초 발기인 4명과 그들이 추천한 인사들까지 합세해 총 16명이 모였다. 흥미롭게도 사진을 생업으로 둔 회원은 머지않아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된 정범태와 발기인 중 3명뿐, 대부분 직업이 제각각이었다. 정범태가 되짚어본 신선회 회원들의 면면들이다.

회사원 이해문, 한국전력 본사 비서실 박용락, 이화 고등 보통학교 교사 조정섭, 진명여고 교사 신석환, 봉명 전기 사장 김계명, 영등포 공업학교 교사 최태섭, 전기부품 도매상 한영수, 조선일보 정범태 등 12인과 발기인 4인(을지로 카메라상 이형록, 조선일보 조규, 경향신문 이안순, 화가 손규문)


신선회(新線會)


모임의 이름은 새로운(新) 선(線), 영문으로 옮기면 new line이다. 사진으로 새로운 선을 그리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역사는 신선회를 1956년 결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사진연구회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선을 그리겠다며 야심 차게 출발했던 신선회는 오래되지 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단명한 탓일까 인터넷에서 ‘신선회’ 이름으로 발표된 사진들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가끔씩 신선회 출신 사진가들의 개인 사진집 출간이나 개인 전시회 개최 소식을 전하는 기사들이 눈에 띄지만, 대부분 '빈티지 사진'이나 '그때 그 시절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 바쁘다.


이제 신선회를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낼 때가 됐다. 역사적으로 단명한 예술가가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켰듯이, 신선회 역시 대한민국 사진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The Pond, Moonlight, 1904 © Edward Steichen /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연초점으로 거의 회화에 가깝게 표현한 사진이다.

잠시 시곗바늘을 좀 더 과거로 돌려 20세기 초로 돌아가 보자. 이 시기 서양 예술계에는 '사진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었다. 미국의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사진도 회화에 가깝게 표현될 수 있다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1904년작 <연못, 달빛>은 그렇게 탄생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당시 <연못, 달빛>과 같은 사진 작품들은 주로 '살롱'이라는 공간에서 전시되었는데, 사람들은 이 사진들을 편의상 공간의 이름을 빌려 살롱 사진이라 불렀다. 네이버 백과사전이 설명하는 살롱 사진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살롱 사진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독특한 사진 경향으로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이라고 하여 회화주의를 표방한 예술사진을 말하는데 일 년에 한 번 살롱이라는 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공모, 심사하기 때문에 살롱 사진이라고 불린다. 사진의 단순한 기록성을 배격하고 회화적 감성을 사진 영역에 끌어들인 이 같은 경향은 사진을 단순한 기술적 재현이 아닌 예술적 차원으로 승격시켰다.


산촌 山村의 아침,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1935  © 이형록

살롱 사진은 바다 건너 대한민국에서도 일제시대를 지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신선회의 발기인 중 하나였던 이형록 역시 사진을 처음 시작한 시기에 살롱 사진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초기작 <산촌 山村의 아침>은 한국 전쟁 중 대부분 분실되고 남아있는 그의 유일한 살롱 사진으로 회화적 표현을 위해 연초점을 이용한 점이 눈에 띈다.


이형록이 차츰 살롱 사진에 회의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해 전쟁의 참혹함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후부터다. 이형록이 말하는 살롱 사진의 한계를 들여다보자.

"당시 작품 조류는 회화 모방 시대로 소재는 주로 화조풍월(花鳥風月), 아름답게만 묘사하려는 초기적인 '살롱 사진' 형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다. 카메라 렌즈의 극명한 해상력을 도외시하고 연초점 효과를 노려 '소프트 포커스' 렌즈나 필터 등을 사용 사물을 부드럽고 감미롭게만 처리한 외형적 미에만 치중했던 것이다."


정범태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살롱 사진을 찍는 사람들 중에 장르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던 이들이 드물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 사진 문화가 들어온 이후, 사진관을 통해서 들어왔든, YMCA 사진교육을 통해서 사진이 시작됐든 전부가 자연사진, 살롱 픽쳐, 살롱 사진들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살롱의 개념도 확실치 않게, 그냥 풍경사진이면 살롱 사진이라는 그런 개념으로 찍었는데, 원래 살롱은 중세 구라파서 귀족들 살롱문화에서부터 시작된 건데, 그런 개념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살롱 사진이라고 사람들은 찍고 있었던 것이거든요."


거리의 구두상, 서울 남대문시장, 1956 © 이형록

신선회는 태생부터 살롱 사진으로부터 탈피를 선언했다. 추구하는 장르가 뚜렷했다. 기록성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사진이었다. 중심에는 발기인 이형록의 신념이 있었다. ‘오늘의 기록은 내일의 역사가 된다'라고 믿었다. 그의 신념은 신선회의 비전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형록이 신선회 창립식 격려사에서 밝힌 비전은 다음과 같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은 과거에 추종했던 낡은 사진 사조를 버리고 사진의 본질인 리얼리즘 사진사조로 개혁하고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하기 위하여 나온 줄 압니다. 우리가 선택한 소재는 '인간'입니다. 인간들의 삶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진실성'을 포착하는 작업입니다. (중략) 그리고 인간들의 일생인 생로병사의 여정 속에서 희로애락이라는 삶의 애환이 우러나오는 '삶의 진실성' 추구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피리 부는 소년', 마포구 신수동 © 정범태/ 이 사진은 1958년 미국의 <US 카메라>지가 주최한 제1회 국제 사진공모전에 입선했다.

리얼리즘 장르에 대한 정범태의 생각 역시 이형록의 창립식 기념사와 뜻을 같이 했다. 정범태는 '인간'을 소재로 한 사진의 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름대로 인간을 찍으면서 보면 제 경우는 사람의 묘미를 느끼는 것은, 꼭 같은 사람을 한 군데에서 100 커트(cut)를 찍었다 하더래도, 그 사람의 생각이 수시로 1초에도 몇 번씩, 몇십 번씩 변하기 때문에 같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느껴서 재미가 있었고, (중략) 그래서 '어떻게 해야 사람의 마음이 빠져나가지 않고 사진 내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는가?' 이것이 상당히 고민스럽고 고통스러웠어요."


공덕동의 아침, 서울, 1958 © 이형록

정범태의 고민처럼 사진 속에 사람의 마음을 빠져나가지 않고 머무를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래 이형록의 말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도 있겠다.

"인간을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사진인들은 인간들의 외형적인 형태미만을 묘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인간의 내면성을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사고방법, 지식, 철학, 사상 등이 담긴 내면세계를 파헤친 묘사 수법이라야 한다는 말이다. (중략) 인간의 내면성을 제대로 알려고 한다면 설정한 모델의 인간성을 예리하고 깊이 있게 관찰할 뿐만 아니라 엄밀하게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엔 예리한 관찰력이 뒤따라야 한다."


© Dewey McLean/ 1950년대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모습인데 한국전쟁 중 미군의 PX로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신선회의 창립 사진전이 개최됐다.

1957년 동화백화점(구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개최된 신선회의 창립 발표전은 같은 시기 경복궁 현대미술관에서 펼쳐진 20세기 최고의 걸작 전으로 평가받는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인간 가족전>과 비교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두 전시회 모두 리얼리즘이라는 사진 사조 아래 '인간들'을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선회의 창립 발표전은 대한민국의 사진계로부터 적지 않은 비난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래 정범태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 당시에 풍경사진을 했던 분들은, 신선회에서 사람을 위주로 사진을 하고 그러니까 리얼리즘이 정착되기 전이기 때문에, 이것은 "신문 보도사진 혹은 잡지사진에서 해야 할 사진들 아니야?" (그랬어요.) 단순하게. 그러니까 전혀 그분들은 책도 보지 않고 그냥 그런 식의 몇 분들이 있었어요. 우리 사단에서 소위 원로라고 하는 분들이."


생소한 장르에 대한 폄하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논란은 사진계를 넘어 예술계 전체로 번졌다. 20세기 초반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연못, 달빛>이 ‘사진도 예술에 수용될 수 있는가’를 두고 서양 예술계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신선회의 창립 발표전도 대한민국 예술계에 똑같은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정범태는 예술계가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고 지적한다.

"고희동 씨 또 조각을 하는 윤호중이니 하는 이런 사람들 "그저 짤카닥이 그게 무슨 예술이야." 뭐, 이런 식으로 해서 사진을 별 볼 일 없이 취급했거든."     


시장의 아침, 서울 남대문 시장, 1957 © 이형록/ 창립 발표전은 1부는 자유작, 2부는 회원 공동작으로 <시장의 생태, 새벽, 낮, 저녁>을 주제로 전시됐다.

신선회의 이형록은 이러한 논쟁을 뛰어넘을 전략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미술전람회에 사진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형록의 목표는 국전(國展)이었다. 1949년 대한민국 미술의 발전, 향상을 위해 문교부에서 창설되어 1980년까지 30년 동안 이어졌던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술전람회였다. 국전에 전시만 된다면 사진이 예술성을 인정받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예술계의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 이형록의 증언을 들어보자.

"국전에 사진부가 들어가야 예술성을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한미협과 한국조각가협회의 원로작가들이 반대했다. 화가, 조각가는 정규대학 코스를 마치고 전문 화가를 스승으로 테크닉 수업 후 작품 활동해서 공모전 입상 등 경력을 쌓은 후 작가 행세하며 국전에 출품하는데, 사진가는 기계로 찍고 인화해서 작품을 한다고 반대한 것이다."


강변 江邊, 서울 한강, 1957 © 이형록

어쩌면 논쟁의 불씨를 지핀 것만으로도 신선회의 창립 발표전을 성공적인 전시회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그만큼 리얼리즘 장르 자체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후 신선회 회원들이 발표한 사진들이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하고 전시회에 소개되면서 리얼리즘은 한국 사진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확산되어 간다.


이형록이 찍은 <강변> 사진은 정범태의 <피리 부는 소년>과 함께 1958년 미국의 <US카메라>지가 주최한 제1회 국제 사진공모전에 입선하는 등 세계 무대에서도 작품성을 인정받게 되는데, 사실 국제 사진 공모전 출품은 사진의 저변 확대를 위해 이형록이 세운 또 다른 전략이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 국내 예술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대장간 노인, 서울 말죽거리, 1956 © 이형록

리얼리즘 사진이 정점을 찍던 시기, 신선회의 사실상 수장이었던 이형록이 돌연 모임 탈퇴를 선언한다. 모임에는 이형록의 사진에 대한 식견 때문에 모여든 회원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타격이 컸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신선회가 유야무야 사라지게 된 결정적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3년 동안 3번의 사진전을 치른 후였다. 이형록은 왜 탈퇴를 결정했을까?


설일 雪日, 서울 남산 계단, 1957  © 이형록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이 선택했던 주요 소재는 주로 빈민과 실업자, 걸인 등 궁핍과 빈곤을 상징하는 대상에 국한되어 있어 시대의 현실을 다각적인 관점에서 보여주지 못하고 특정 주제만을 부각시키는 편협함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 평론가 박평종은 그의 저서 <한국 사진의 선구자들>에서 정점에 있던 리얼리즘 사진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리얼리즘 사진이 피사체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 인해 구도와 앵글, 화면 구성 등 사진의 형식적 요소를 소홀히 함으로써 완결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다."


결전박두 決戰迫頭, 서울 신당동, 1960 © 이형록

리얼리즘 장르에 대한 평단의 비판적인 의견들을 의식하고 있었던 걸까? 이형록 역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사진계에 살아있는 전설인 사진가 육명심이 2002년 잡지 <사진 예술> 기고글에서 밝힌 이형록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자.

"그는 리얼리즘 사진이 좀 심하게 말해서 미친년 속곳 가랑이를 까발리듯 무조건 마구잡이로 현실을 직시하고 파헤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내면적인 함축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할 때 리얼리즘 사진의 예술성은 더욱 증폭된다고 생각했다."


결전의 날, 서울 신당동, 1959 © 이형록

같은 시기에 정범태 역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고 언급했다. 훗날 정범태가 회상한 이형록과의 대화 내용이다.

"3년 동안에 그렇게 조금 전에 말씀하신 대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오고 그러니까, 뭔가는 조금 사진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우연치 않게 이형록 선생을 만나서, (중략) 내가 얘기했더니, 이형록 씨 역시 "어찌 내 생각하고 그리 꼭 같는가." 그러면 우리가 따로,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그룹을 만들든지, 그룹을 안 만들더래도 사진을 같이 한번 해봤으면 되지 않겠나. 그래서 3년을 마치고 이형록 씨하고 정범태가 신선회를 정식으로 탈퇴를 했던 것입니다."


유전 流轉, 서울 한강, 1960 © 이형록/ 이형록이 신선회 탈퇴 이후 조형미를 염두에 두고 찍은 사진이다.

이형록과 정범태가 주축이 되어 총 6명이 모여 새롭게 만든 소규모 단체가 살롱 아루스(Salon Ars)다. 살롱 아루스는 기록성을 바탕으로 둔 리얼리즘을 기본으로 하되 살롱 사진의 조형미와 균형을 이룬 장르를 추구했다. 이형록은 이를 '세련된 리얼리즘', '상징성과 깊이 있는 모던한 사진'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살롱 아루스 역시 5.16 군사 쿠데타 시 인원 감축으로 회원 중 두 명이 직장을 잃으면서 1년을 채 버티지 못해 해체되고야 만다.


화이트 X마스, 서울 명동, 1960 © 이형록

안타깝게 사라지지 않았다면 신선회도 살롱 아루스도 한국의 매그넘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같은 맥락으로 이형록은 리얼리즘의 기록성과 살롱 사진의 조형미 사이에서 균형 잡힌 사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고 재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동동 冬童, 서울 한강, 1956~7 © 이형록

매그넘은 시작부터 에이전시 형태로 출발해서 수익배분이 확실했다. 에이전시 이름으로 따온 프로젝트의 경우 에이전시가 수익의 40%를 가져가고, 사진작가가 개인적으로 따온 프로젝트의 경우 에이전시가 수익의 30%를, 기존에 발표한 사진의 재인쇄 본의 경우 수익을 50%씩 나눠 가지는 것이 원칙이었다(Warren, 2005). 어쩌면 이 수익배분 구조가 매그넘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만약 신선회가 매그넘처럼 수익배분이 확실한 에이전시 형태로 자리매김했다면 아직까지도 건재한 사진그룹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사진 작품을 돈 내고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시대였다. 공짜로 얻는 걸로 생각했다. 2002년 <한국 사진과 리얼리즘(눈빛)>이 나왔을 때 받은 원고료가 처음이었다."

위 내용은 미국의 매그넘과 달리 수익 자체를 기대할 수 없었던 이형록 자신의 사진활동에 대한 가슴 시린 증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형록은 94세 나이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긴 세월 동안 사진계를 떠나지 않았다. 이 점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형록의 증언을 이어서 들어보자.

"신선회 시절 신앙촌 카스테라 두 개로 점심 식사하면서 영하 20도 한강의 빙판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사진에 미쳐서, 결국은 자기 자신이 사진에 미쳐서 안 하고는 못 배겼다.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이 꽃 핀 것은 이런 미친 사람들 덕이다. 6.25 동란을 거치며 춥고 배고픈 시절의 1940-50년대였다. 피폐하고 초토화한 환란 시대, 가난한 서민들이 힘들게 생활할 때 사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정말 그땐 미치지 않으면 사진을 할 수 없었다."   



평창동 소년, 서울, 1960 © 이형록


이형록의 바람대로 사진은 1965년 비로소 국전(國展)에 수용됐다. 그가 신선회를 결성한 해로부터 9년 만의 일이다.



"꾕가리 소리가 아무리 쉴 새 없이 울려 보아야 시끄러울 뿐이지 가슴을 울리는 한 방의 징소리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는 뜨거운 내용성이 담긴 찬스 라야 되는 것이다. 과연 내가 그동안 셔터를 누른 수많은 영상들 중에 단 한 장만이라도 제3자의 가슴을 파고드는 셔터 찬스의 화면畫面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라는 말이다."


- 2008년 12월 이형록이 동아사진동우회에 기고한 격려사 중에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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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태 관련 인터뷰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1950년대 후반 신선회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진문화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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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록, 박평종, 육명심의 증언들은 모두 이형록의 개인 사진집에서 옮겨왔습니다. 온라인 자료가 없어 링크를 공유하지 못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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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록의 사진들은 모두 그의 개인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들을 스캔하지 않고 제 개인 DSLR으로 재촬영하여 업로드했습니다. 화질이 원본에 못 미칩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찍은 것이 아니므로 저작권 등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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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내용 중 잘못 기술된 부분이 있으면 아래 댓글 달아주세요. 충분히 검토 후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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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대문에 걸려있는 사진은 리얼리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일요일은 사진이 좋다> 여섯 번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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