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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Dec 02. 2019

쉰에 삶의 가나다를 배우다

- 스스로 잉크 카트리지를 교체하던 날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아무리 인쇄 버튼을 다시 고쳐 눌러봐도 프린터는 계속 하얀 종이만 뱉어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1년여 만에 작동시키는 프린터는 말을 듣지 않았다.     


쓰던 노트북의 용량이 적어서 작업이 불편하던 차에 올봄에 남편이 용량도 크고 휴대도 더 간편한 탭북을 사줬다. 나의 작업이라는 것이 워드로 글을 쓰고 그 글을 브런치나 블로그에 발행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큰 불편함 없이 잘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나는 제주에서 고사리, 감귤 등의 자연물을 채취하거나 농사를 지어 지인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산물을 포장할 때는 상품을 설명하고 나의 농사에 대한 소신이 담긴 안내지를 넣어 택배 포장을 한다. 그런데 작년에 뽑아 놓은 안내지의 내용이 좀 변경되어서 부득이하게 수정해서 재인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이 탭북과 인쇄기는 서로 연결이 되어있지 않았다.     


아무리 탭북에서 인쇄 버튼을 눌러도 인쇄기는 요지부동이었다. 연결이 안 돼 있으니, 너무도 당연했다.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그저 누군가 이미 연결해 놓은 컴퓨터와 인쇄기에서 인쇄만 할 줄 알았지, 한 번도 컴퓨터와 인쇄기를 연결해 본 적이 없었다. 선을 연결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무선으로 가능한 건지. 당장 포장을 완료하고 오늘 중으로 택배가 나가야 하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인지라 밀어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깊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이라는 것을 했다. ‘남들도 다 한다. 너는 바보가 아니다. 너도 할 수 있다. 네이년한테 물어보면서 천천히 해보자. 정 안되면 면사무소에 가서 뽑아 달라고 하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인쇄기 기종을 검색어에 넣으니 프로그램 ‘다운로드하기’가 나왔다. 거기로 갔다. 가서 내 기계의 기종을 검색했는데 자꾸 ‘없는 기종’으로 나오는 거다. 거기서 또 정신이 아득. 여러 번 시도 끝에 내가 가진 인쇄기는 프린터가 아니라 복합기라는 것을 알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무사히 탭북에 복합기의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무리 인쇄를 눌러도 복합기가 인쇄를 인식하지 않는 거였다. 안 되는 게 너무 당연하지. 이게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한다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복합기에 텝북이 잡고 있는 무선 와이파이 번호를 넣어야 하는 거였다. 몇 번이고 찬찬히 지시어를 읽고서 그 깨달음을 얻고 나서 나는 씩 웃으며 내 무릎을 쳤다. 역시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거실에 있는 ‘와이파이 기기’로 달려가 기계 번호와 비번을 메모했다. 또 다다다 달려와 복합기 앞에 앉아서 찬찬히 숫자와 문자를 입력했다. 마침내 복합기 액정에 OK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그때의 희열이란. 한글을 깨친 순간의 기쁨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 여 서일곱 살 쯤의 언문을 깨쳤을 때의 흥분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다시 인쇄 버튼을 눌렀다. 2,3초 후, 마침내 ‘띠딕’ 소리와 함께 복합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온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의기양양하게 복합기가 뱉어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냥 하얀 종이일 뿐, 아무것도 인쇄가 안 돼서 나온다. ‘이럴 리가 없는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계속 인쇄 버튼을 눌렀지만 똑같이 흰 종이만 나올 뿐. 복합기를 열어 보려고 했지만 어떻게 여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두 시간 동안 걱정과 고민, 흥분과 떨림, 기막힘과 허탈함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자리를 펴고 누울 지경이 되었다. 택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딱 살기 싫다는 뜻이다. 이 나이까지 뭐 하나 혼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 밥이나 겨우 해 먹고 애들 가르치는 거 빼고는 20여 년을 청소며 빨래, 집안의 소소한 일부터 거의 모든 일을 남의 손에 의존해서 살았다. 남편이, 부모님이, 살림해주는 언니가, 직원들이 나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내가 그들 덕에 사람 꼴로 살았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여기 제주에는 오롯이 나 혼자다. 살아온 삶과 생활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제 겨우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너무 사소한 것들에서 좌절된다. 그냥 인터폰 해서 ‘프린터 안돼’라고만 하면 다 해결되던 시절이 간절히 그리웠다.    


하지만 나는 삶의 터전, 직업, 삶의 방식, 심지어 친구와 남편까지 완전히 바뀐 세상에 막 나온 쉰 살 유아기.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이제부터 하나씩 배우며 살면 된다고, 날마다 새로운 것들을 배우니 얼마나 신나냐고 나의 두려운 마음을 다독여주던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저녁 먹는 것도 잊고 일단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찬찬히 복합기를 살펴봤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잉크 카트리지가 들어가 있는 곳을 열 수 있었다. 검은색과 칼라 잉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이미 자면서 작년에 여분으로 사 둔 잉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으니 ‘이걸 한번 갈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도전을 한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복합기에 끼워져 있는 잉크를 살짝 흔들어 봤다. 흔들렸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어 봤다. 빠질 거 같았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냅다 흔들면서 빼봤다. 성공. 내가 장착되어 있던 잉크 카트리지를 스스로 뺀 것이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나머지 하나도 뺐다. 그리고는 새 잉크를 꺼내고 좀 전에 꽂혀 있던 그대로 다시 끼워 넣었다. 쉬웠다.     


이제 다시 탭북을 켰다. 문서를 열고 인쇄 버튼을 눌렀다. 문서가 복합기로 전송되는 그 짧은 2,3초가 마치 1 시간 같았다. 드디어 인쇄기가 작동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종이가 나왔다. 보기 좋게 문서가 인쇄돼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혼자 힘으로 또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쉰 살이라는 모든 것에 노련할 나이에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나. 많이 불행한 삶, 고독하고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들도 많았다. 내 의지가 아닌 인생의 장난질로 살던 삶에서 추방되어 마치 무인도에 살고 있는 듯이 적막하고 쓸쓸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기 마련이다. 나는 어느 틈엔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럴 때마다 내가 기특하고 자신감이 생긴다.


나는 나에게 속삭여준다. 남은 삶도 다시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이제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제2의 인생이 열린 거라고. 모든 것이 도전이라고. 곧 좋은 친구들도 생길 거라고. 다시 예전처럼 씩씩하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삶을 두 번째 살고 있으니 얼마나 새롭고 좋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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