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산책
11월인 요즘은 점점 낮이 짧아져서 6시면 이미 밤처럼 깜깜하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일을 마치면 6시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 봐야 남편도 귀가 전이고, 요즘 저녁 단식으로 딱히 저녁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어서 이참저참 하여 이 요일에는 엄마와 저녁 산책을 한다.
마당에 차를 대면 엄마는 벌써 대문 밖에서 나를 기다린다. 엄마는 아버지가 병원에 들어가시고 밤이면 더욱 쓸쓸하신 것 같다. 처음 두 달은 밤에 무섭다고 아직 여름인데도 온 집에 창이며 문을 꼭꼭 잠그시고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깨고 불안 해하셨는데, 석 달째 들어서니 점차 괜찮아지신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엄마와 나는 밤 산책을 나선다.
엄마와 컴컴한 동네 길을 크게 세 바퀴 돈다. 언덕을 올라 성모상 앞을 지날 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걸음을 멈추고 절을 한다. 그 성모상은 내가 태어났을 때도 거기 그대로 서서 우리 마을을 굽어보고 계셨다. 성모상을 지나 막바로 다시 한번 언덕길을 오르면 도미니카 이모네 배 밭에 이른다. 어림잡아 만평에 이르는 이모네 배 밭을 지나 이모네 집 앞에서 좌측길로 들어서면 우리 동네 스타 길자 언니네 집이 나온다. 길자 언니는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일이면 일, 동네 일이며 성당 일에 진심이라 모두 다 좋아하는 언니다. 언니네 집 앞길을 지나 내 어릴 적 친구, 혜경이네 집을 끼고 좌측으로 돌면 명주 아저씨네 돌담 집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동네 복지회관 길로 들어서면 배 밭길이 나온다. 그 배 밭은 길자 언니에 배 밭인데 ‘화상병’이 돌아 올해로 배 농사는 끝이라고 한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관에서 나와 땅을 파고 한꺼번에 배나무를 묻어버린다고 한다. 지난달에도 멀쩡하게 주렁주렁 배를 매달고 있던 나무들인데, 20년 이상 그 배나무들을 돌본 길자 언니에게는 자식 같은 나무들인데. 지난 주일에 언니는 뭘 해도 신이 안 나고 그냥 우울하고 한숨만 나온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배 밭길을 지나면 동네 총무 언니네 집이 나오고 거기서 또 좌측으로 돌면 동네 앞길인 ‘주막거리’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때 닦아놓은 신작로가 지나가던 길. 성환, 입장에서 안성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쉬면서 탁배기라도 한 잔씩 하던 주막이 있었을까. 우리 동네 사람들은 마을 앞길을 옛날부터 ‘주막거리’라고 불렀다. 실제로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작은 가겟방을 같이 하던 주막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일반 주택인 그 주막 자리 건너편 쪽으로 제법 큰 국밥집이 개업을 기다리고 있다. ‘주막거리 해장국’. 우리 마을 이장님이 여는 해장국집인데 식당 이름이 딱인 거 같다. 간판은 류연복 화백님이 써준 글씨체라고 하는데 제법 멋있다. 나는 그 주막집이 빨리 오픈했으면 좋겠다. 그냥 조용한 시골 동네가 좀 왁자지껄하면 좋을 거 같다. 그리고 어느 주말에 친구들이랑 우리 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놀다가 새벽에 그 집에 가서 해장을 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과연 그런 체력과 열정이 남아 있을까? 꿈같은 얘기다.
주막거리 앞에서 또 좌회전을 하여 마을 앞길로 들어오면 내 한없이 선한 친구 연수네 집이 나온다. 연수 어머니 차옥자 여사는 우리 엄마의 최애절친이기도 하시다. 엄마는 뭐든지 차여사님과 함께 하신다. 오전에는 항상 두 분이 만나서 커피를 한 잔 하시고 마을 가꾸기 노인 일자리 일도 두 분이 같이 하시고, 마을 공동 식사 도움이도 두 분이 같이 하신다. 나는 두 분이 모두 건강하게 장수하시기를 늘 빈다. 그토록 다정한 벗이 누군가 먼저 가고 나면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쓸쓸할까. 우리 엄마의 모든 내밀한 속내까지도 다 아시는 차여사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기원합니다.
그렇게 동네 길을 따라 쭈욱 들어오면 마을 한복판에 우리 엄마 집이 있고 엄마 집 앞마당 건너편에 나는 내 집을 짓고 있다. 눈만 뜨면, 문만 열면 빠꼼히 보이는 곳에 엄마 집과 내 집이 있다. 엄마가 하루라도 더 건강히 오래 살아서 나와 밥을 같이 먹고 밤산책을 다녔으면 좋겠다.
우리는 세바퀴를 돌며 온갖 이야기들을 한다. 대게 나는 듣고 엄마가 얘기한다. 엄마는 정말 말을 많이 한다. 하루 생활의 브리핑과 세세한 느낌과 감정까지 쉼 없이 말씀하신다. 나는 그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언젠가는 지겨워질 날이 오겠지? 나는 그런 날이 올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