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가 무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 Jan 04. 2023

느린 독서

심란하던 시기에 우울증에 걸린 친구에게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나는 그 얘길 들어줄 여유가 없었지만

우울증이라는 것이 필연 외로움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최선을 다해 대화에 임하려 했다.

때론 짜증으로, 때론 충고로, 때론 우울함으로 마무리되는 통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에게 운동을 권유했고, 운동할 힘이 없다고 하길래 천천히 걸어보라고 했다.

걷는다는 것은 위험에 노출되는 행위라고 그가 말했을 때

조금은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집에서 멀지 않은 곳 단 5분만 걸어보라고 했다.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고민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독서를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동안 공부에 대한 강박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할 수 없다는 불길함이 몰아쳤다.

책을 펼치면 마지막 장에 도달하고 싶은 급한 마음이

독서를 방해했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한 충고처럼 다 읽으려 하지 말고

하루에 한 페이지만 읽으면 되지 않냐고 했다.

그의 약속처럼 나도 약속했다.


그날 이후 나는 딱 한 페이지만 읽는 연습을 했다.

그것은 수월했고 부담감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지던 독서가 조금씩 진척을 보였고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잘 쓰인 책 한 페이지에는 그 책의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많이 읽기보다는

꼼꼼하게 읽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주었다.

문학을 읽을 때도 비슷했다.

한 페이지의 서사와 대사에는 함축하는 모든 것이 존재했다.


많은 경험을 하기보다

단 한순간 그 경험을 위해 모든 것을 쏟는 것이 더 유익했다.

그렇게 나는 좀 더 단순한 삶을 이어갔고

그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보려고 노력했다.

느린 독서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오늘도 많이 읽지 말고 자세히 읽자는 다짐으로 독서를 한다.

느리게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 그가

지금쯤 느리게 걷는 방식을 터득해

짧은 산책에서 많은 것을 발견했으리라 믿는다.

그가 내게 알려준 것처럼.


그리고 오늘은 내가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뇌를 위한 휴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