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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원 Jun 20. 2022

부지런한 여유

생전 처음 '진짜' 여유를 만난 날의 기록

6월 12일 일요일 오전 10시 49분, 호텔 체크아웃 후 일찍 문 연 카페를 찾아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목을 축이는 중이다. 어젯밤 혼자 심취해서 마셨던 와인 한 병이 내 속을 괴롭히고 있지만, 바쁜 현대인 코스프레를 하며 고고한 자세(?)로 탄산 가득 요청한 음료를 마시고 있다.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게으른 사람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주말은 강박적으로 쉬어야 하며 무조건 늦잠을 자야 보상을 받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늘 J 성향을 코스프레 하는 편이었다. '토요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서 호수 한 바퀴를 뛰고 아침을 차려 먹어야지.', ' 일요일 아침은 아까우니까 더 일찍 일어나서 이불 빨래를 하고 커피를 내려 마셔야지.' 목표 달성률은 늘 마이너스.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 이미 전날 새벽 3시인걸. 일찍 일어나긴커녕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눈을 비비며 일어나 허망해진 계획을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게으른 여유는 주말을 괴롭게 한다는 걸 어제까지의 나는 알지 못했다. 


태어난지 2N년차, 어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왔다. 여행을 혼자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좋은 거, 맛있는 걸 먹을 때면 함께 호들갑 떨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재밌으니까. 하지만 역시 사람은 본인이 경험하지 못하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혼자 여행이 이렇게 즐거울지 몰랐다. 가고 싶은 곳에 멋대로 가고, 먹고 싶은 걸 아무 고민 없이 먹을 수 있다. 혼자 많이 먹으니까 행복했다. 좋은 걸 보면서 혼자 호들갑 떨게 되니 생각하고 느낀점을 상상하기 수월했다. 내 안에 영감들이 계속해서 솟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좋은 걸 여태 모르고 살았다니. 아니, 이제야 알게 되어서 다행인걸지도! 


부지런이라고는 DNA에 1%도 흐르지 않는 내가 스스로 아침에 일어나 호텔 조식을 챙겨 먹었다. 물론 그 과정에도 수많은 번복이 있었지만 말이다. 밥을 먹고, 샤워를 끝낸 뒤 몇 개월 동안 아껴뒀던 불리 바디오일 샘플을 몸에 발랐다. 평소라면 더 아껴뒀을 샘플인데, '온전한 나'의 여행이라고 생각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과감해져서 그런지 오일은 미친듯이 향기로웠다. (계속 맡다 보니 약간 목욕탕 냄새가 나는 것이 썩 내 취향은 아닌 걸 깨달았다. 왜 그렇게 아꼈는지 퍽 혼자 실소했다) 문제가 있긴 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책을 읽는데, 자꾸만 테이블에 오일 자국이 남는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냅킨으로 계속 닦아냈다. 쉽게 지워지지 않아 곤혹스러웠지만 그 마저도 자꾸 웃게 된다.


취향이 아닌 향기를 머금은 채 느끼는 여유.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며 보는 책. 문득 이제서야 괴로움이 없는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를 느끼는데도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게으른 날의 여유와 차원이 다르다. 



@무원, 220612 대구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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