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의식의 흐름에서부터 온 발상으로, 절대 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너저분한 집을 청소하기 싫어서 기어 나온 곳은 역시나 집 근처 카페. 이번 주말은 정말 세계 최강 게으름뱅이를 겨루는 관찰 버라이어티를 찍는 듯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먹고, 자고, 싸기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대회에서 1등을 하는 치욕쯤은 얻고 싶지 않으니 목욕을 재개하고 노트북을 주섬주섬 챙겨 집을 나섰다. 일종의 회피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지도. 아무튼,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빨랫감과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기어 다니는 꾀죄죄한 이불보, 어제 먹다 남은 새우 초밥 꽁다리가 흩어진 식탁 등을 피해서 낙원을 찾아 떠나온 것이다.
이렇게 나태하고 게으른 일상을 보내다 보면 학창 시절 아빠가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던 ‘바로바로’, ‘제자리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세 살 나태함 여든까지 간다고. 어렸을 적부터 게으른 베짱이었던 나를 돌보던 부지런의 결정체 우리 아빠. 나는 매일 양말을 뒤집어 놓았고, 아빠는 매일 뒤집힌 양말을 다시 뒤집으며 “양말 좀 뒤집어 놓지 마라” 염불을 외웠었다. 하지만 사춘기인 베짱이의 귀에 들어올 턱이 없는 말. 나는 언제나 양말은 뒤집어 놓고, 쓰던 물건은 언제나 여기저기 자기 자리가 아닌 곳만 골라서 배치해 두는 능력을 발휘했다. 아빠랑 함께 살 때는 내 나태함이 이만큼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에겐 세계최강 부지런한 아빠가 있으니까. 내가 쓰던 물건을 아무렇게나 놓을 때마다 잔소리하면서도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아 놓던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쓰던 수건을 아무 바닥에 던져놔도, 먹던 라면 봉다리를 쓰레기통에 버려놓지 않아도 아빠는 잔소리와 동시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한 상태로 돌려놔 주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아빠의 잔소리를 참 싫어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아빠가 보고 싶을까. 더러워진 방을 깨끗이 돌려줄 아빠가 없어서 보고 싶단 소리는 아니다. (아니다. 사실 30프로쯤은 맞다.) 아빠가 염불 외우듯 했던 말처럼 꼬박꼬박 쓰던 물건을 제자리에 두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 솔직하게 고하자면, 이 글을 다 쓰고 집에 돌아가기 두렵다.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와서 너저분한 집을 싹 치워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깨끗한 이불과 침대가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 피신 해버리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마주해야 하는 산더미 같은 집안일뿐. 도망칠 수 없는 내 나태함의 결과물과 마주해야만 한다. 계속 두면 곪아 터져 버리는 맹장염처럼 나를 아프게 할 거다. 나태함이라는 병은 ‘바로바로’, ‘제자리에’ 처방전으로 치료할 수 있다. 병든 자의 결심이 아주 많이 필요한 처방이다. 부지런한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은 코웃음 칠 처방이다. 하지만 나에겐 너무도 쉽지 않은 방법. 그치만 다른 방법이 없는걸. 집에 돌아가서 깨끗이 대청소를 하고, 앞으로는 꼬박꼬박 썼던 물건 제자리에 잘 놔두는 사람이 되어야지. 한번 어긋나면 이렇게 괴로워지니까. 염증이 기어오르는 맹장 끝을 잘라 다시는 아프지 않게 꽁꽁 동여매야지.
@무원, 220828 집 앞 카페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