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여권 사진을 찍으러 집 근처의 작은 사진관에 갔다.
흰 벽 앞, 낡은 의자에 앉아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곤혹스러웠다.
고개를 비뚤지 않게 세우는 것, 턱을 당기고 입가에 힘을 빼는 것,
미간을 찌푸리지 않는 것. 평소의 습관과 표정을 하나씩 정지시키는 과정은 묘하게 어색했다.
내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던 표정 근육과 자세를 일시 중지한 채,
남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꽤 불편했다.
모든 것을 견디고 잠시 후 사진사가 건네준 결과물을 받아 들었을 때,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에 휩싸였다.
사진 속 사람은 내가 매일 아침 거울로 보던 내가 아니었다.
운동을 미뤄온 탓에 조금 경계가 사라진 턱선, 생기라고는 없는 무표정,
그리고 어딘가 낯설고도 이질적인 인상.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전날 거울을 볼 때만 해도 이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왜 단 한 장의 정직한 사진 앞에서 나는 이토록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걸까.
우리는 평소 생각보다 훨씬 정교한 필터를 끼고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거울 속 얼굴은 내가 가장 오래, 가장 자주 본 얼굴이다. 좌우가 반전된 모습이지만,
우리는 그 반전된 얼굴을 반복해서 보며 그것을 ‘나’라고 학습한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익숙함이 호감을 만들어내는 단순 노출 효과가 자기 얼굴 인식에도 작동하는 셈이다.
반면 사진은 다르다. 사진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내가 아닌 남의 시선 쪽에 가까운 얼굴을 보여준다.
미세하게 비대칭인 눈과 입, 익숙하다고 믿었던 균형이 사진 안에서는 묘하게 어긋나 보인다.
거울에서는 괜찮았던 얼굴이 사진에서만 낯설어지는 이유다.
내가 평소 ‘나’라고 믿어온 것은 실체 그 자체라기보다,
반복 노출을 통해 안정화된 자기 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자신을 꽤 관대하게 인식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은근히 더 나은 각도를 찾고, 미세한 표정을 조정하고,
조명 좋은 곳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다시 말해 내가 평소 ‘진짜 나’라고 믿어온 이미지는
사실 뇌가 어느 정도 다정하게 보정해 준 버전에 가깝다.
나의 여권 사진은 바로 그 편향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모든 완충 장치를 제거하고,
아무런 해석도 덧붙이지 않은 채 나를 기계적으로 기록해 버렸다.
요즘의 우리는 이미 지나치게 강한 이미지 자극 속에서 살고 있다.
보정 앱, 필터, 피부 보정, 얼굴 비율 수정, 그리고 AI가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으로 정교한 얼굴들.
너무 매끈하고, 너무 또렷하고, 너무 완성된 이미지들이 매일같이 눈앞을 지나간다.
원래는 비현실적이어서 특별해야 할 이미지들이 이제는 오히려 표준처럼 소비된다.
초정상 자극(supernormal stimulus).
본래의 자극보다 더 강하게 과장된 자극이
오히려 생물의 반응을 더 강하게 끌어내는 현상.
우리의 시각 환경은 요즈음 그 방향으로 많이 이동해 있는 것 같다.
보정된 얼굴, 설계된 비율,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가장 매끈한 이미지들은
현실의 얼굴보다 더 높은 강도의 미적 신호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그러니 우리의 감각이 조금씩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예전 같으면 충분히 괜찮다고 느꼈을 얼굴이 이제는 어딘가 부족해 보이고,
정직한 사진 한 장이 유독 초라하게 느껴진다.
실제의 내가 갑자기 못나진 것이 아니다.
다만 내 눈이, 내 뇌가, 이미 현실보다 더 과장된 자극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여권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기준에 길들여져 있는지를 드러내는 불편한 증거가 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진 속 못난 내가 진짜 나일까,
아니면 디지털 공간 속의 조금 더 괜찮아 보이는 내가 진짜 나일까.
예전 같으면 쉽게 답했을 질문인데, 지금은 선뜻 말하기 어렵다.
나는 일과 유희 활동을 합쳐 거의 하루의 반 정도는 디지털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처음 인식하는 방식도 대면보다 프로필 사진이나 메신저 이미지,
화상 화면을 통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화면 속의 나는 단지 가짜라고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두 개의 자아가 겹쳐진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늙고 지치고 붓는, 물리적 신체를 가진 나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나다.
전자는 생물학적 실체에 가깝고, 후자는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인식적 자아에 가깝다.
지금의 삶은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존재가 중첩된 채 살아간다.
여권 사진을 보고 느낀 당혹감은,
이 두 자아 사이의 간격이 생각보다 훨씬 벌어져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확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화면 속의 나를 통해 사회적으로 기능하고 있는데,
정작 물리적 얼굴은 그 인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이 불편했던 이유는 못생김 그 자체보다도,
내가 믿고 있던 자기 표상과 기록된 실체 사이의 오차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진관을 나오며 아~ 운동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오이미 높아져버린 내 인식의 기준과,
그 기준을 따라가지 못한 물리적 실체 사이의 시차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 속의 보정된 이미지를 여권 사진과 같은 '날 것'의 이미지로 교체하는 것보다는
실제 몸을 인식적 이미지로 조금씩 바꾸는 쪽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시대를 산다는 것은,
결국 이 두 자아 사이를 어떻게 조율하며 살 것인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 보이는 이미지를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권 사진 속 냉정한 얼굴만을 유일한 진실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둘 다 분명 나다. 다만 그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질 때, 문득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설어질 것 같다.
여권 사진 속 낯선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집 근처 헬스장을 검색했다.
지금의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나를 따라잡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