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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n 20. 2020

여름의 맛, 노각의 맛

내 여름 보양식 노각무침

  노란 호박인지 긴 참외인지 모를 일이다. 길쭉하지만 뭉뚝하고 영글다 못해 노쇠해버린 모양이다. 색깔은 누리끼리하고 하얀 줄무늬는 어울리지 않게 촘촘하다. 수확이 늦어버린 식물이라 하기엔 단단하다. 한 손에 잡고 툭 따 차가운 물에 풍덩 빠뜨린다. 두꺼운 껍질을 벗기고 반을 가르면 참외 씨 만한 씨앗이 가득 차 있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하얗고 단단한 속살에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름 반찬은 노각이다. 늙은 오이라고도 부르는 노각은 풋오이보다 30일 후에 수확한다. 어린것들보다 더 오랜 시간 해와 비를 받아서인지 오이 주제에 늙음의 곁들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간직하고 있는 속살은 굳건해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아주 일품이다. 나박하게 썰어 소금에 절였다가 씻어 물기를 꼭 짠 노각은  초고추장에 무치거나 장아찌를 담아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입맛 없는 여름철, 속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운 음식만 찾게 되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시원한 물에 만 밥과 이 노각무침이 생각난다. 오도독 씹히는 맛은 무말랭이 무침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크느라고 늘 몸에 열이 돌던 어린 시절, 여름이면 난 잠시도 더운 걸 참지 못했다. ‘배탈 난다’는 어머니의 잔소리에도 입엔 찬 걸 달고 살았다. 냉장고 속 시원한 수박을 먹고 나면 쭈쭈바 빨고 쭈쭈바 빨고 나면 하드 집던 날 저녁이면 속이 좋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배가 아파 어쩔 줄 몰라했는데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혀를 차다가도 눌러 놓은 누룽지를 삶아 이 노각무침과 함께 상을 봐주었다. 직접 누른 누룽지는 찰지고 부드러워 술술 넘어갔고 누룽지 한 숟갈에 올린 노각무침은 입맛을 돌게 해 평범한 누룽지도 별미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누룽지에 노각무침으로 저녁을 먹고 나면 내 장은 또 엄청난 회복력을 자랑했다.



  


  노각무침에 관한 추억은 또 있다. 초등학생 때 나는 여름방학이면 남동생과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 할머니 댁에 가 한량처럼 시간을 보내다 오곤 했다. 사방천지 논과 밭뿐이던 할머니 댁 동네는 슈퍼마켓이라고도 이름 붙이기 민망한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어른들은 그 구멍가게를 ‘구판장’이라고 불렀다. 그 '구판장'에는 식재료부터 동네 어린이들을 위한 종이인형까지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종종 내게 구판장에 가서 ‘막걸리 한 병 사 오너라’며 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다. 천 원짜리 한 장을 들고 가면 꼭 오백 원이 남았는데 그 오백 원으로 나는 과자를 사거나 아이스크림을 샀다. 할아버지는 오백 원을 가지고 있어도 꼭 천 원짜리를 쥐어주며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 여름날이 너무도 무료한 손녀에게 주전부리할 구실을 만들어주신 셈이다. 구판장 앞 평상엔 언제 어느 시간에 가도 한 무리의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계셨다. 작은 부락 마을이라 내가 뉘 집 손녀인지 익히 알고 계셨던 어른들은 내가 인사를 하면 드시고 계시던 안주거리를 집어 내 입에 넣어주시곤 했다. 어느 날은 알싸하게 매운 고추전을, 어느 날은 새빨갛게 양념해 프라이팬에 구운 돼지불고기를. 그것들은 계통 없고 구색이 맞나 싶어도 한입 먹으면 깜짝 놀랄만한 맛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 없이 내 입에 쑥 들어온 안주거리가 있었으니 노각무침이었다. 장아찌를 무친 것이었는데 전혀 짠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되려 시원한 식감에 단맛이 느껴졌다. 달콤 새콤하고 고명으로 얹은 붉은 고추의 매운맛까지, 동네 할머니들 틈에 끼어 맛보았던 시원한 물에 만 밥과 노각무침은 나에게 여름의 맛이었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여름이면 노각을 멸치반찬 마냥 먹고 자라서인지 여름이면 늘 노각무침이 생각난다. 노각이 없어 아쉬울 땐 풋오이라도 고추장에 찍어 먹어야 여름을 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에게 노각무침은 여름을 잘 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보양식인 셈이다.


  이젠 봄이 사라져 새 계절 맞을 준비도 없이 여름을 맞는다. 올해 시장엔 노각이 언제쯤 나올까 손가락으로 날을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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