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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ojeong Jan 09. 2024

지인과 친구 구별하기

유난히 길고 고단하게 느껴졌던 2023년이 드디어 지나갔다. 여러 힘들었던 일들도 이제는 '작년'이라고 생각하니, 한 챕터를 넘긴 것처럼 매듭지어진 기분이다.


연말 카운트다운보다 신년 해돋이를 선호해서 1월 1일 인근 산에 올랐다. 헤드렌턴을 장착하고 어두컴컴한 산길을 지나 탁 틔인 전망대까지 갔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예정보다 늦어지는 일출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눈이 쌓여 얼어버린 빙판길,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해, 한파에 얼어가는 몸... 일출을 보기까지 마음졸이며 버텼던 순간들이 뭐가 이리도 나의 2023년 같기만 하던지. 작년 한 해의 압축판이라 해도 될 법한 싱크로율이다.



꽁꽁 언 손을 비벼가며 제자리 뛰기를 하는데 생뚱맞게 풋, 하고 웃음이 났다. 하루는 사진작가님과 취재를 나갔다가 저녁을 먹었던 기억이 나서다. 식당을 가려고 내 차로 함께 이동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유턴을 해야 했다.


"사실 제가 길치예요. 생각보다 조금 더 늦게 도착할 거 같아요."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해요."

"예전에는 길을 헤매거나,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타면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났는데요. 그래봤자 바뀌진 않아서 이젠 받아들였어요. 집도 네비 보면서 가는 걸요."

"잘 알죠. 그 정도는 저에게 매일 있는 일인 걸요. 얼마 전에는 지갑도 잃어버렸어요. 이것저것 하도 잃어버려서 비싼 건 사지도 않아요."


뜻밖에 고수였다. 나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미는 길치 만렙에 분실 전문가. 봇물터지듯 쏟아내는 에피소드들은 하나같이 주옥같았다. 어쩐지.. 내 차 위치를 몰라서 다른 층의 주차장을 몇 바퀴 돌 때도 작가님은 순순히 따라 걷기만 하셨다.


간혹 일하는 사이지만 손발이 잘 맞거나, 대화가 즐겁거나, 공감대가 잘 형성되는 사람이 있다. 업무로 만났으니 서로에게 큰 기대 없이 적당한 거리감과 긴장감을 깔고 있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친근함과 편안함이 쌓이기도 한다.



작년에 나에게 중요했던 화두 중에 하나는 관계였다. 힘든 시기를 겪으며 이해와 위로를 받고 싶었고, 수직하강하는 자존감을 지켜줄 누군가의 따뜻한 관심이 필요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민을 터놓기도 했지만, 다들 자기 고민을 한아름 떠안고 사는지라 더 힘 빠지게 만드는 나의 시름을 경청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호불호가 강하세요. 마치 0과 1밖에 없는 것처럼요. 0.5같은 중간 관계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해요."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찾아간 상담센터에서 서울대학교 박사 출신의 상담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두서없이 한 말들을 간추려서 맥락을 짚는 것이 놀라웠고, 따뜻한 눈빛과 공감어린 말들로 상처난 마음을 다독여 주어 감사했다. 여력만 되면 평생의 마음 주치의로 삼고 싶을 만큼.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알았는데 적당한 거리가 있는 중간 관계를 많이 만들어 보라니, 신선한 조언이었다. 나의 언어로 요약하면 친구보다는 지인을 만들어라!


사전적 의미에서 지인은 아는 사람, 친구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가깝다는 기준은 모호하지만 누군가를 친구라고 여기면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생긴다. 원하는 관심, 이해, 위로 등을 받지 못하면 서운하기도 하고 점점 뜸해지는 연락에 씁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인이라 생각하면 가끔씩 안부 인사만 나누어도 반갑고 만족스럽다.


지인이면 고맙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친구라고 생각하면 무심하게 느껴져 섭섭하다면, 그 사람을 지인으로 남겨두라고 권하고 싶다. 친한 지인이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만나는 의미있는 애착 관계는 두서너 명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 외에는 그냥 아는 사람 ‘지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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