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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iin Feb 14. 2024

 내가 하려는 게 도피유학이라니.

어쩌다 런던정착기| 아차 싶어 돌아보니 도피유학이더라.

나는 공부가 하고 싶어 영국에 왔다. 공부가 너무너무 하고 싶었다는 사람 치고는 열과 성으로 정보를 수집하지는 않았다. 공부를 미친 듯이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가고 싶은 학교는 분명했고, 그 학교 한 군데만 지원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온 힘을 쏟아부었을 이들에게는 면목이 없다.


나는 2019/20 학기 입학을 생각하며 대학원에 지원했다. 남들은 해외유학 전문사를 통해 입시컨설팅도 받고, 박람회도 다니며 정보를 얻는다던데 나는 오로지 혼자서 모든 것을 준비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 송구하지만, 대학원 입시 당시 나는 지독하게 우울한 인간이었다. 실패한 인간이 되어버릴 예정인 나를 데리고 살자니 덜컥 겁부터 났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참 세상 다 산 듯한 고민을 했구나 싶다. 아무튼 그 시절 나는 괴로움으로 밤마다 베개를 적셨다.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에세이를 쓰는 일이 마치 구원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모순적인 나는 "입시시장"을 종횡하는 내 모습을 그리며 어쩐지 속물이 되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전략적으로 행동할 에너지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학사 졸업 후 변변한 직장 없이 1년을 보냈기 때문에, 입이 떡 벌어지는 컨설팅비용을 감당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때마침 주변에 같은 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분위기에 쉽게 휘둘리는 타입으로, 그 우연한 바람에 편승해 함께 자소서를 쓰고 CV를 만들어 원서를 제출했다. 얼마나 휘뚜루마뚜루일지 마주할 엄두가 나질 않아 이제는 열어보지도 않는 그 활자들이 내 손을 떠났다. 초라한 나의 기록은 기특하게도 살아남아 처음에는 웨이팅리스트로, 그다음에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또 다른 대기자 명단으로 나를 이끌었다. 사실 떨어졌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하나 나는 당시 잃을 것도, 이 계획을 접을 포부도 없는 백수였다. 


'혹여나'를 읊조리며 매일 수신함을 들락거렸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을 때였던가 2020/21년 선발에 지원서를 올려줄 테니 CV와 자기소개서를 수정해 다시 업로드하라는 메일이 왔다. 나는 답답해서 행복했다. "아 내가 완전히 답도 없는 무용지물은 아니구나!" 완전한 사망선고는 아니라는 게 그렇게도 반가웠다. 이게 시한부 기한의 유예일지라도 기다릴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게 기꺼웠다. 나는 이 실낱같은 안도감을 버팀목 삼아 다시 한번 기다림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2월쯤이었던가 나는 또다시 대기자 명단에 올랐다. 참을성이 바닥나고 있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정말로 끝이고 허송세월을 보내느니 공무원 시험을 보리라 생각했다.


덜컥 축하한다는 이메일을 받은 것은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혹시 모르니" 아침에는 영어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바깥공기를 조금 쑀다. 나머지 넘치도록 많은 시간은 의미 없는 일들로 채워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 맘쯤 나는 안될 운명을 직감했다. 수신함을 확인하는 횟수도 자연스레 줄었다. 저물녘 무심코 이메일을 열어보니 "Admissions"라고 선명히 적힌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무려 이틀 전에.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떨어졌어. 마침표를 직감하면서도 메일을 여는 손은 벌벌 떨렸다


"Congratulations!"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떨어져야 이 비극을 완성할 수 있는데? 기쁘지 않았다. 얼떨떨했던 걸까? 떨어지지 않는 것이 목표였던 건지, 합격이 목표였던 건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얻고 싶었던 답은 무엇이었을까.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최종탈락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기대하며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꾸는 나를 단죄하려던 건가.


텅 빈 머릿속을 치고 든 것은 안도감이었다. 엎지르고 쏟은 얼룩이 덕지덕지 묻은 도화지는 부욱 찢어버리고 다시 시작해야지. 진정 이게 내가 그토록 바라온 순간의 전말인가. 참담했다. 그런데도 숨통이 틔이는 기분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이 나라가 아닌 곳에 간다이 관짝 같은 현실을 떠난다. 해방. 그것이 환상일지언정 죽어도 나는 내 모국에게 목덜미를 부여 잡혀 놀아나지 않는다. 


장황하게 적어내고 보니 이 이야기의 시작은 도피유학이다. 어설프나마 배우고 싶던 것이 있어, 그것을 도구 삼아 잠시라도 족쇄 같은 현실을 떨치고 떠나는 일. 아무렴 오늘의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비해 느긋하고, 나 자신과 세상에 조금이나마 여유롭다. 무엇보다 만성적으로 달고 살던 화병(火病)이 몇 년째 잠잠하다. 하나 내가 불시착한 이 나라에는 또 다른 근심과 우려와 고민이 산다. 


성공한 해외정착을 당신께서 어떻게 정의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까지는 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내 삶에 영국이주 같은 건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사고이니 성공과 실패를 운운하는 것도 사실은 우스운 일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실패한 이민, " "성공한 이민" 같은 건 없다는 걸 안다. 도피였으면 어떤가. 나는 지금 우연히 손에 쥔 칼자루 덕에 신나게 칼춤을 추어보는 중이다. 우리는 그저 상황에 맞춰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 뿐이다.


나는 요즘도 종종 한국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그중 3분의 1을 월세로 내야 할 때, 한번 외출할 때마다 만원이 넘는 교통비를 감당해야 할 때, 이 나라가 얼마나 외국인에게 불친절한 나라인지를 실감할 때 종종 나는 가족과 친구라는 울타리가 단단히 버티고 선 집으로 돌아가 숨고 싶다. 


사주쟁이는 내가 엄마 젖을 찾아 돌아갈 팔자라 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운명을 믿는다. 다만 운명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면, 나도 그리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닐 뿐.



한국을 떠나 살아온 시간이 모조리 아름답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에 살던 내가 왜 그리도 괴로웠는지 무엇이 그리 아팠는지 말하지 않고는 무정한 런던을 이야기할 수 없다. 혹여나 이 글을 읽을 당신이 괴롭더라도 나는 다음 글에서도 우울한 한국의 나에 대해 써야 할 것 같다. 혹시라도 굉장한 F의 성품으로 나를 연민하고 계시다면 감사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길. 이 이야기는 무려 3년 6개월 남짓 전에 시작된 이야기로 나는 지금 꽤 단단하고 지나가는 백인 아저씨의 멱살을 움켜쥘 수도 있을 호기를 장전한 외관만 "큐트 리틀 에이시안 걸"이 되었다. 만약 이 우울한 글을 끝까지 읽어 내셨다면 그 또한 감사하다. 만약 나의 우울이 당신의 우울과 닿아있었더라면 나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위로가 되었길 바란다. 당신을 우울하게 하는 세상은 당신만 우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우울 속에 함께다. 아무리 우울해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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