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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iin Feb 13. 2024

당신은 환상, 나는 현실.

어쩌다 런던정착기

런던으로 이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내가 런던 땅에 발을 디딘 것이 어느새 3년 전, 아득한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때는 지독한 역병이 동아시아를 휩쓸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기세를 뻗치던 때였다.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국경이라는 둑. 그때 영국은 무능한 실권자들이 구멍 난 보트에 차오르는 물을 허우적대며 퍼내기에 정신이 없었다. 아수라로 가라앉는 이 나라에 바퀴가 깨져 기우뚱 넘어지는 슈트케이스를 몸무게로 부축한 내가 서있었다.


어찌어찌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버티다 보니 이곳에서 3년을 살았다. 4년 차 외국인이 된 것이다. 특별히 영국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이 나라가 나를 흠모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을 떠날 때 이토록 오랫동안 남의 나라에서 지내는 꿈은 꾸어본 적이 없다. 누구나 그렇듯 해외생활을 동경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이주가 나의 현실이라면 그것은 헛된 망상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스스로를 방문자로 규정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을 그리며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오래. 가만 보니 나는 남들보다 눈과 귀가 밝은 희한한 재능을 타고 났더랬다. 그 탓에 남들은 쉽게 놓치고 지나가는 모난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유명한 K 장녀의 불운을 어깨에 지고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보니 내 꿈은 세상에 민폐가 되지 않는 사람, 보탬은 되고 숨이 다하면 감쪽같이 잊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부가 하고 싶었다. 말은 흩어지고 글은 남으니,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보탬이 될 글을 쓰고싶었다. 수많은 고민의 밤을 보낸 끝에 내린 선택지가 영국이었고, 덜컥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이곳으로 와야할 근거는 내가 마련했으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디테일은 신의 몫이었다. 돌려 막기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연애를 하고, 직장을 잡고, 친구를 사귀고, 쉴 곳을 찾아버렸다. 인간은 외로워서 죽는 동물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당최 속을 알 수없는 신이라는 자는 내게 이곳을 떠나면 안될 이유를 하나 둘 씩 쌓아대고 있었다. 다시말하지만 나는 정에 약한 한국의 K장녀다. 어릴적 구몬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 소식을 듣고 눈물 콧물 다 짜내며 울던 대책없는 감성파였다. 고단한 하루 끝을 기꺼이 내게 내어주는 그들을 떠나기엔 영영 마지막이 될 것같은 아쉬움이 나를 막아섰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을 보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이 부서질듯 아플 이별 투성이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부순 뒤 먼지에서부터 쌓아올리면 될일이지. 무모한 생각을 해본다.


나는 여행을 마칠 땐 엄마가 기다리는 집이 아닌 내 작은 단칸방을 그린다. 낡은 열쇠로 잠긴 문을 열며 "아, 드디어 집에 왔다"라고 외친다. 이곳이 집이 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나의 현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로망과는 8,897.91 km 만큼 멀다. 런던과 서울 사이의 거리. 나는 현실을 떠나 판타지로 이주한 것이 아니다. 현실을 떠나 가늠해 볼 수도 없는 거리에서 마주한 또 다른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을 뿐이다.


사주쟁이가 그랬다. 나는 엄마 젖을 그리워하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이 이야기가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일지, 집을 떠나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파랑새의 이야기일지 나는 모른다. 주먹구구로 기운 누더기인 줄 알았던 일상이 펼쳐보니 퍽 근사한 퀼트이불이 될 것도 같은 기분에 젖어 뻐근하게 정신승리하며 가는 것이다. 나의 현실이 당신의 로망을 산산조각 낸다 해도 하는 수 없다. 나는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살아내며 쏟은 눈물과, 작은 승리와, 쉼 없이 찾아드는 불안에 대해 쓸 작정이다. 당신의 현실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 나의 글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남의 나라에서 소위 말하는 개고생을 하는 인간도 있다는 사실이 당신의 삶에 가만한 위로가 되기를.


(런던에 정착해 살아가는 "동양인 고학력 여성"이 날마다 이뤄가는 이야기와 불현듯 느끼는 위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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