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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10시간전

관문 지키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공

양정에서 서면으로 이어지는 송공 삼거리를 지나려면 송상현공 동상을 만나게 된다.

언제부터 서있었는지는 모르나 우리가 부산 이사 왔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은 교통량 많아진 도로도 재정비되고 송상현 광장이 조성되며 약간 위치만 바뀌었다.




1592년 4월 14일 선조 재위 시 왜선이 부산포 앞바다에 까맣게 몰려왔다.

조선의 관문인 부산진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바로 다음날 왜군은 개미 떼처럼 동래성으로 밀려왔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란 글귀를 부사에게 보낸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빌려달라며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뜻을 비친다.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중인데 길을 좀 비켜달라는 말이나 고니시는 애당초 도성 치고 올라가 조선 왕만 사로잡아 갈 생각이었다.

송공은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즉답한다.




곧 치열한 동래성 전투가 벌어져 끝까지 항거하나 중과부적,

결국 병사들과 성민은 물론 가축들까지 모두가 처참스럽게 몰죽음을 당한다.

당시 전투를 돕고자 울산에서 온 경상좌수사 이각은 패색 완연하자 뒷산으로 도주했다.

말하자면 대장군이 줄행랑을 친 셈, 무관이 이럴진대 송공은 문과에 급제한 출신으로 문신이다.

충절이라는 윤리 도덕에 바탕을 둔 정의로운 기개가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이리라.

망국적 사색당파의 폐해를 낳은 유교라 성토하나 이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키운 사상이기도 하다.




영조 때 이르러 송상현 공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자리에 송공단(宋公壇)을 지어 매년 음력 4월 15일 제향을 올린다.

송공이 묻힌 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후손이 살고 있는 청주 수의동.

그곳을 지나게 설계됐던 경부고속도로마저 이를 피해 곡선으로 휘었다고.

동래성을 지키고자 결사 의지로 분전하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공 동상은 오늘도 묵묵히 호국정신 일깨워준다.

한편 초량에는 부산 첨사로 부산진성을 지키다 순절한 정발장군 동상이 돌격 자세로 용맹스럽게 서 있다.

朝鮮通信使行列圖와 동래부사접왜사도 화폭을 살펴보면 조선과 왜 나라의 문화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법도에 맞게 의관 반듯한 조선인, 반면 왜인들은 이때까지도 맨발에 하의 실종인 아주 민망스러운 차림새였다.

촌사람 서울에 와 눈 휘둥그레지듯 난생처음 마주한 산천 구경하랴 향연 구경하랴, 그들은 정신 줄 놓기 맞춤 맞았다.

통신사 수행 인원만도 200여 명, 그들이 수십일 머무는 동안 접대 문제며 차질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

먼저 외교문서 작성하고 손님 대 소홀함 없이 연회도 베풀어야 했으니 부사 역할은 왜와의 외교 관계까지 담당하는 자리였던 것.


이 모든 일을 총괄해야 하는 동래부사는

행정 도맡아 관민을 다스리는 한편 금정산성을 지키는 수성장 권한과 아울러 바다 쪽 관문을 지키는 국방은 물론 외교도 주관해야 했다니 임무가 막중했다.


부산포를 지키는 일은, 왜적에 유린당하지 않도록 조국 강토 앞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이기도 한 셈이다.

온전히 다 막지는 못했다 해도 도성으로의 진격 속도를 늦춰 방비책 세울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동래성 전투였다.

참혹한 혈전이 곳곳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은 그 후 칠 년간이나 이어졌으니 백성들의 고초야 일러 무엇하리.

임란 이후 세월이 흘러 동래부사로 온 이안눌이 남긴 한시 일부는 이러하다.

임진년 오늘/성이 함락되었소

어미는 딸을 곡하고 / 딸은 어머니를 곡하며

아낙네는 남편을 곡하고 / 남편이 아내를 곡하며

형제와 자매까지 산 자는 모두 곡을 한다오

 그래도 곡할 이 있으면  슬프지 않다오

 퍼런 칼날 아래 모두 죽어

곡할 이조차 없는 집안이 그 얼마이리오.

-동래 맹하 유감-

왜란 치르며 피폐해진 살림 추스르느라 효종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호국선열들의 충절 기리는 반듯한 사우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세워진 충렬사 의열각이나 송공단에 동래부사의 첩 금섬, 정발장군의 첩 애향이 순절 선열로 배향된 점이 의아했다.

마지막을 모셨다지만 도대체 정실부인은 그때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당시 부사 나이 한창때인 사십이었더.


한양에 본가를 두고 지방에 내려와 홀로 지내는 벼슬아치들이 그러하듯 금섬이란 기녀가 송공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함흥 출신의 기녀인 금섬은 열세 살 되던 해에 동래부사로 부임하는 송공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왜군이 동래성을 공격해 부사와 수많은 병사들이 맞서 싸우다 순절하던 날,

금섬은 공을 찾아 나섰다가 왜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왜적을 꾸짖으며 사흘을 대적하다 결국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비록 기녀였지만 송상현의 첩으로써 의로움과 충절을 보여주었기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금섬순난비가 송공단 뒤편에 세워졌다.

정발장군을 모시던 애향 역시 장군이 장렬히 숨을 거두자 절개를 지키고자 옆에 있던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그렇게 충복이나 애첩도 단 위에 비석 세워 기림 받는데...


조선시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관직을 받아 떠날 때 가족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당시 이동수단으로는 큰 살림 이사 자체가 어렵기도 하겠지만 조정 입장에서는 가족을 일종의 인질로 붙잡아 두었을지도.


지방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세력을 키워  모반이라도 일으킬까 두려워서였겠지.

난리 통에 지아비 잃고 죽지 못해 겨우겨우 한세상 살다 간 마님의 넋은 누가 위로해 주고 기려줄 건가?

왜 사신 행렬도를 확대해보면  훈도시 차림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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