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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은 변덕스러웠다

by 무량화 Aug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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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바람이 하도 어수선히 불어 잠에서 깼는데 구름장 사이로 해 머리가 살짝 드러났다.

여섯 시 즈음이라 이미 해 떠올랐을 시각, 하늘 가득 포진한 비구름층 틈새로 내쏘는 빛에도 열기가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자 강풍이 쏟아져 들어왔다.

운무에 감싸인 한라산은 자취 감춰버렸는데, 와우~서북 방향에 커다란 무지개가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급히 폰을 들고 나와 사진에 담으려 했지만 전모를 잡을 수 없을만치 규모가 대단했다.

살다가 이처럼 거대한 무지개는 처음 본다.

보통 반궁형 한 끝이 한라산 남록 각시바위 언저리에서 시작하여, 다른 끝자락은 삼매봉 못 미처에서 마무리 됐으나 이번은 외돌개 앞바다에 이르는 듯.

무지개와의 조우만으로도 흥분감 고조되는데 더욱이 워낙 큰 무지개라, 마치 특별한 행운이라도 예약한 기분이 들며 심장이 빠르게 펌프질 했다.

강한 바람을 타고 빗줄기 오락가락했으나 개의치 않고 자구리 앞바다로 나갔다.

일본 열도를 훑고 지나간다는 태풍 '산산'이 북상 중이다.

제주는 직접 영향권에 들지는 않았어도 풍랑특보가 내려진 상황이다.

오늘부터 30일까지 '산산'의 간접 영향으로 강풍에 너울성 파도를 주의하라는 예보가 떴다.

그래선지 멀찍이서도 허옇게 이는 파랑으로 미루어 해풍의 위력이 느껴졌다.

아침 내내 서귀포 날씨는 종잡을 수 없을만치 들쑥날쑥 변화무쌍했다.  

잠시 한순간도 쉴 틈 없이 흐렸다가 해가 쨍 났다가, 먹장구름이다가 파란 하늘이다가, 빗방울 어수선히 날리기도 하며 온갖 곡예를 부리고 있었다.

이중섭 거리를 지나 자구리 해안으로 내려가는 동안 미친 듯 사방팔방에서 강풍 휘몰아쳤다
늦매미 그악스레 울어제쳤으나 하지만 오늘 최고 31도 최저 27도인 기온에다 바람까지 거세 매우 시원했다.

밤낮없이 폭염에 시달리다 2~3도 떨어지니 감지덕지, 생광스럽지 않을 수가.

서귀포에 '섶섬이 있는 풍경'을 선사한 ㅈ ㅜ ㅇㅅㅓ ㅂ 아제 .

중섭아제네 가족이 게를 잡던 자구리 해안으로 내려갔다.

피난지 서귀포의 언덕배기 반장집 창고방 하나를 얻어 세 든 이중섭 가족.

네 식구는 한 칸 남짓한 셋방에 얹혀살았다.

그래도 네 식구 오손도손 따습고 정겨웠으나 그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으니 겨우 몇 달 정도 이어졌을 뿐이다.

이 방에서 복닥거리며 자구리해변에 나가 게를 잡고 한라산 발치에서 나무새 뜯어 식량 삼아야 했던 곤궁한 생활이었다.

훗날 이중섭의 그림에서 게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때 게를 많이 잡아먹어 미안한 심정에서 그리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까지 영양실조로 시난고난 비칠거리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해방 후 한일간 국교단절이 된 데다 전쟁통의 혼란기라 이중섭은 함께 갈 수가 없었다.

일본 동경 문화학원 재학 시절 미술과 선배이자 천재화가로 소문난 키 큰 미남 유학생 이중섭과 사랑에 빠진 일본 처녀 마사코.

1945년 현해탄을 건너와 함경남도 원산에서 이중섭과 전통혼례를 치렀으며 이때 이남덕이란 이름을 신부에게 선사했다.

남쪽에서 온 덕있는 여인이라는 의미의 새 이름으로 살며 그녀는 아들 셋을 낳았으나 맏이가 돌전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남을 잃은 이중섭은 아들이 관 속에서도 쓸쓸치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발가벗은 채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다고.

죽은 아들이 천국에서 따먹으라고 주로 탐스러운 천도복숭아를 그려 넣었다는 일화도 있다.

만조때인듯 자구리 해안가는 물이 가득차 있었다.

수수만년 너울 치며 밀려온 파도는 오늘도 서귀포 앞바다 자구리해변에서 물거품으로 산화하기를 반복했다.   

전쟁통의 피난처였던 서귀포에서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일본인 아내 마사코는 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푸른 물결은 지치지도 않고 바다 넘나들며 서귀포와 일본을 오가건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리운 이들은 꿈길에서나 만날 수 있었으니.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며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다시 만나서 행복을 가꾸리라 꿈꾸었던 이중섭.

그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중섭 생애에서 그나마 가장 오붓한 한때였던 서귀포에서의 11개월.

가족들과 어울려 바닷가에서 게를 잡고 은박지일망정 그림도 그렸으니 그에게는 유토피아가 바로 여기였으리라.

서귀포와 관련된 그림들은 그래서인지 하나같이 따뜻하고 즐겁고 포근한 순간들로 사랑스러이 표현됐다.

원래 향토적 소재인 소를 즐겨 그려온 화가로 대표작 '흰 소'와 황소 그림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일 정도였는데 말이다.

원산에서 하루는 소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몰려 도망가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회고하는 아내.

그러나 서귀포 시대에 이르러 섬·게·물고기·아이들을 소재 삼아 동심처럼 천진난만하고도 단순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훗날이긴 하지만 '그리운 제주도 풍경' 같은 게를 주제로 하여 가족의 단란했던 한때를 회상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들로부터 기증받은 작품들로 이중섭미술관에서 특별전이 개최된 적이 있었다.

그중 ‘섶섬이 보이는 풍경’, ‘해변의 가족’, ‘아이들과 끈’ 등은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서귀포와의 인연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거미가 거미줄을 짜듯이 거리낌없이 나오는 것, 그것이 중섭  예술의 본질이다.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섭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중섭은 제주를 떠나 부산, 통영, 대구, 서울 등지로 떠돌며 <소> 연작과 <부부> 등 걸작을 쏟아냈지만 날로 건강이 악화됐다.

가족들과 헤어진 뒤 사무치는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심신이 피폐해져 한창나이인 41세에 행려병자처럼 적막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동안의 애틋하고 애절한 마음들은 백수십 통의 편지글 되어 그림과 함께 영원히 남겨둔 채로.

자구리 해변에서 정방폭포로 가다보면 소낭머리를 지나게 된다.

원래부터 솔동산으로  불릴만큼 소나무(소낭)가 많았던 곳이다.

주변 행정명이 송산동인 것도 이에 연유함이 아닌가 싶다.

전망이 훌륭해 바로 앞에 문섬이 동그마니 앉아있고 새섬이 저만치 누워있다.

정방폭포를 비롯해 자구리해안, 소낭머리, 소정방, 거믄여 등 절경을 뽐내는 서귀포 이 해안가는 그러나 4.3당시 도민들의 시신 즐비했던 끔찍한 역사의 현장이다.

제주도 한라산 남쪽 지역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면사무소와 남제주군청과 서귀포경찰서가 있었다.  

현재 송산동 주민센터는 과거 서귀포면사무소였으며 4.3 당시에는 2연대 1대대의 본부 건물로도 사용됐었다.

개교한지 100년이 넘는 유서깊은 서귀포초등학교는 1대대 6중대 병력의 주둔지였다.

서복전시관 야외 공연장은 4.3당시 전분공장 겸 수용소였으며 집단 학살이 자행되던 논(畓)이었다.

4.3 당시 정방폭포를 중심으로 한 서귀리(현 송산동) 지역은 군부대가 주둔했던 헌병대의 거점지역.

토벌이 강화되면서 토벌대의 주요 근거지가 되어 대대본부와 취조를 담당하는 정보과가 있었다.

서귀포경찰서에서는 중산간 초토화 이후 야산을 헤매던 피난민이나 혐의자들이 붙잡히면 이곳 군부대에서 취조를 하고 여차하면 처형되었다.

민간인을 상대로 취조과정에서 구타, 고문이 연일 자행되면서 비명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이때 취조 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을 처형했던 주민학살터가 된 곳이 정방폭포 상단과 이어지는 소낭머리다.

소낭머리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결국 4·3사건 당시 산남지역 혐의자 대부분은 정방폭포에서 희생됐으니 희생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던 것.

정방폭포와 소남머리에서 학살당한 희생자 수는 247명.

각종 자료를 통해 알려진 숫자이지만 밝혀지지 않은 실제 희생자 수는 더 많다고.  

아무튼 4·3에 대한 보다 적확한 규명이나 조명이 가능한 건 남북통일 이후가 아닐까?

좌우가 극렬하게 대치했던 당시이며 현재도 이념 갈등 국면이라 남북 간의 역사적 사실이 고증으로 적나라하게 밝혀진 다음으로 미뤄야겠지만, 억울한 피해 당사자 구제도 미룰 수 없는 일이고...딜레마다.  

소공원 전망대에서 옆 층계를 내려가면 바닷가에 소낭머리 노천탕과 용천수장이 나온다.

자구리에서의 애연한 심사 뒤로 하고 정방폭포로 향했다.

수직으로 뛰어내리는 그 결기와 폭포 줄기가 흩뿌려대는 뽀얀 비말이 보고 싶어서였다.

전신을 내던지며 주저치 않고 낙하하는 그 정결한 지조라니.

남성적이기보다 섬세한 모시천처럼 선 고운, 그러나 품섶에 은장도를 숨긴 서늘한 나신!

장마는 길었지만 가뭄을 타고 있다는 서귀포라 풍부한 수량은 기대치 않았으나 조신한 자태로 내리는 폭포가 오히려 더 다감스러웠다.

우레 같은 굉음 발하는 웅장한 폭포수도 멋지나 이만큼만으로도 여전스레 열광하는 팬덤층 두터운 정방폭포.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 사시장철 끊이질 않는다.

왜 아니 그러하랴.

한라산 남녘에서 발원해 힘껏 치달려 왔노라.

단숨에 바다로 직진해 내리꽂는 정방폭포.

장쾌하다.

한 점 주저함도 없는

한 치 망설임도 없는

일 획 흐트러짐 없는

확신에 찬 담대한 투신이다.

거침없이 낙화하는 물방울의 집단 춤사위.

일사불란하면서도 자유롭다.

볼수록 황홀하게 매료되는가 하면

연타로 내뻗는 KO 펀치이듯 통쾌무비 그 자체다.

일상에서 쌓였던 크고 작은 스트레스,

해묵은 쳇증 툭 무너져 후련히 내려간다.

가슴속 앙금 있어 슬몃 쓸어내린 적 있다면

모름지기 한번은 정방폭포 앞에 서 볼 일이다.

폭포 하얗게 가루져 휘날리는 물보라에 젖어볼 일이다.


윤선도의 시조, 만흥(漫興) 고마이 빌려다가 축복 충만한 서귀포살이 정방폭포 감회를 대신 갈음하며...


만흥1

산수간(山水間)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향암의 뜻에는 내 분(分)인가 하노라.


만흥2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실컷 노니노라

그 나믄 여나믄 일이야 부러울 줄 있으랴.


만흥3

잔들고 혼자 안자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든 님이 온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 하노라.


만흥4

누가 삼공(三公)보다 낫다 하더니 만승(萬乘)이 이만하랴

이제로 헤어든 소부허유(巢父許由) 약돗더라

아마도 임천한흥(林泉閑興)을 비길 곳이 없어라.


만흥5

내성이 게으르더니 하늘이 아르실샤

인간만사(人間萬事)를 한 일도 아니 맛뎌

다만당 다톨이 없는 강산(江山)을 지키라 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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