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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매진 May 17. 2019

마음의 속도 그리고 거리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지, 쥐도 새도 며느리도.



상담을 하러 갈 때, 사람들은 상담자가 어떤 사람이기를 기대할까?



상담자의 모습은 다양하다. 대부분은 잘 정돈된 마음과 자세로 흔들림 없이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을 생각하겠지, 라고 추측해본다. 그리고 왠지,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 같은 치료자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 힘들다고, 어디 아프다고 말 안해도 짚어줄 것 같은 명의, 그런 명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역시 심리치료(상담)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그런 모습들을 상상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들이 진짜 그런 인간(욕이 아니라...)일 것이라고 단정 짓고,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만이 상담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담자의 이미지를 이야기할 때 나는 줄곧 어린 시절에 가졌던 부모에 대한 판타지가 떠오른다. 성인(聖人)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많으니까 알 것이라던가, 원래 잘하는 사람이라던가 하는.


부모님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몇 살 쯤인지 금방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모든 것에 초연해보이던- 어찌 보면 말도 안되게 이성적이고 포용적이고 친절했던 부모가 처음으로 '섭섭하다'는 부정적 감정을 표현했을 때 깨달았다. 나는 어느 순간 부모를 성모마리아나 부처님 수준으로 여기고 있었구나.



그때쯤 나는, 그런 감정은 자녀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거의 유일하지 싶다. 내 행동 혹은 존재만으로 금방 울 수 있는, 나보다 큰 어른. 결코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찌 됐든 부모가 나와 같은 한계와 감정을 지닌 인간이었고, 누군가의 딸 아들이었고, 지금의 내 나이보다 철 없는 어린 시절에 결혼했었다는 것을 연달아 깨닫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리고 딸 아들 부모 그런 페르소나, 이름, 다 빼고 보면 난 그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또 다른 인간이었다.


그걸 깨닫게 해준 건 말이었다. 갖고 있는 마음이 아니라, 눈치가 아니라 입을 통해 나오고 귀를 통해 청각피질에 들어온 말. 그래서 나는 어떤 시점에 적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주는 모든 사람들이 고맙다. 컵에 물을 대신 채워줄 때의 고마움부터 지금 좀 마음이 불편한데 더 배려해줄 수 있는지 서운함을 표현하는 일들까지, 말이 되어 나오니 상황은 (종국에는) 늘 나아졌다.


말 없이 슬쩍 건네는 꽃이나 포옹도 힘은 있지만 말은 내뱉지 않으면 절대 형상화되지 않고, 전달되지 않는다. 꽃이나 포옹 속에 말 한마디가 섞일 때 힘은 배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이 이래, 라고 보여주는 것은 결국 말이다. 그런데 또 그만큼 어려우니 잘 하지 않는 것이 '말'이다. 부부치료 중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껄끄러워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몇십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리고 자녀에게는 말한다. "말을 해야 알지, 답답해 죽겠네"


그렇다. 말로 해야 안다. 모든 관계가 그렇다. 부모-자녀, 부부, 심지어 상담자와 내담자 관계에서도. 사람들은 친밀감을 느끼는 관계가 곧 말이 필요없는 관계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세상에 말이 필요하지 않은 관계는 딱 하나 뿐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그런 이유로 부부치료에서는 부부 간 대화를 연습하고, 부모자녀 갈등을 일으키는 가족치료에서는 가족 간 대화를 연습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자 상담을 하러 갔다면, 상담자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 대화 안에서 지금 당신이 느끼는 감정, 생각, 이전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만 꺼낼 필요는 없다. 치료 시간 중 상담자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혹은 얼마나 편안한지, 어떤 면에서 신경 쓰이는지 모두 말할 수 있다. 말로 인해 비로소 마음의 속도를 맞추고 거리를 좁히고, 함께 걸을 수 있다.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혼자 멀리 가버리거나 뒤쳐져서는 안될 것이다. 


마음의 속도를 맞추고 거리를 좁히는 것은, 혹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은 여러모로 중요하다. 



A는 함께 일하는 B의 물색없음을 늘 못마땅해 했다. A는 조용하고 수용적이었고, B는 활기차고 요구적이었다. B가 은근히 A에게 일을 부탁하고(혹은 떠넘기고), 물색없는 밝음으로 '우린 친구'라는 말을 할 때 A의 마음 속에 묵은 분노와 못마땅함이 켜켜이 쌓였다. A는 상담중이었다. 상담자는 A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연습'을 시켰다. 불편한 감정을 말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고 했다. 오랜 시간 두려움에 망설였던 A는 이윽고 B를 마주하고 말해버렸다. '미안한데, 그런 부탁 하는거 나는 불편해. 내 일도 너무 바빠서 스트레스가 많아, 앞으로 각자 알아서 했으면 좋겠어'. 비록 목소리에서 떨리는 감정이 전달되기는 했겠지만, 효과가 있었다. B는 A의 의외의 모습에 한발짝 물러났고, '그렇게 느끼는지는 몰랐어, 이건 내가 할게'라며 돌아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화는 내 앞의 장애물이 무엇인지 간파하게 해주는 중요한 감정이고, 불안은 날 해칠 수도 있는 무언가를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말하지 않을 때 화와 불안은 쉽게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감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바로 내가 결정할 문제이다. 문제해결을 하기 위한 신호로 쓸 것인가, 고구마 백개 삶은 계란 백개로 쓸 것인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내담자 C는 늘 상담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하였다. 상담자가 주는 과제는 늘 "좋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상담의 목표에 대해 논의할 땐 "선생님이 해주시는 말이 다 맞는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둘 다 느끼고 있었다. 상담자가 먼저 느껴지는 마음을 이야기하자, 내담자 C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은 잘 이해되지 않아요, 이걸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런 것들을 한다고 나아질 수 있을까요? 전 지금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상담자는 내담자가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에 당연히!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마음을 말해주어서 기쁘다고,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나 같아도 그럴 것이라고, 이건 힘든 작업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여기서 상담을 하는데 '과제'가 있어?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다. 상담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온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인지행동치료, 변증법적 행동치료 등 임상심리전문가가 사용하는 많은 심리치료기법에서 과제와 내담자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상담자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다. 대신, 상담에 부담을 느끼자마자 다음 약속에 나오지 않고 그만두는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나쁜 의도라기보다, 거절의 말 마저 어렵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아마 상담이 아닌 다른 대인관계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그만둘 수 있으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힘들지 모른다. 



심리상담이 다른 인간관계와 다를 수 있는 것은, 사회 생활 중 지나치는 수 많은 인간관계보다 상대가 훨씬 더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비언어적 행동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내가 상담을 끝낸 뒤에도 나의 말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나아갈 방향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상담자와의 관계에서 잘 말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나와 안전한 관계를 형성한 상담자에게 '말해도 괜찮구나', '말하니까 더 나아지는구나'라는 경험을 하고 나면, 밖에서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나중에는 껄끄러운 관계의 사람에게까지. 물론 유능한 상담자는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속도를 맞추기 위해 늘 상담자에게 말하면 된다. 아직은 어려워요, 조금은 용기가 생겨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상담 안팎에서,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 

곱씹어 생각하고 연습해보자.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말할 것인가?"





내담자: 심리치료(심리상담)를 받기 위해 연구소(상담센터)에 방문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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