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분만실에서는 생각보다 FDIU(자궁 내 태아사망, fetal death in uterus)를 자주 마주하게 된다. 분명 모성간호학 수업 때도 배웠던 것이고 알고 있던 것이지만 직접 마주한 그 첫 순간은 내 인생에서 절대 잊히지 않는 매우 명료한 순간으로 남아있다.
때는 내가 입사한 지 4개월 차, 이제 막 독립하여 겨우 일 인분의 몫을 해내고 있던 신규 때였다. 그날따라 이브닝 근무가 너무 바빴고 진통실 산모도 곧 아기가 나올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때 스테이션 전화가 울리고 차지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아 엄마가 의식이 없나요?... 지금 바로 갈게요." 선생님은 어쩐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급하게 불렀다. "선생님, 지금 빨리 NST(태동검사, Non-stress test) 기계랑 Doppler(태아심음 듣는 기계) 들고 응급실로 가. 빨리 뛰어! 가서 아기 소리 안 들리면 바로 교수님 콜 해. 알겠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 파악할 시간도 없이 내쫓기듯 병동을 나섰다. 왜 뛰는지 뭐가 응급인 건지 그런 건 뛰어가며 생각할 일이었다. 뇌는 비우고 발은 빠르게.
응급실로 뛰어들어가 분만실에서 왔습니다! 하자마자 응급실 1 구역 간호사 선생님이 여기요! 바로 나를 불렀다. 기계를 달달 끌고 다가가보니 배가 이미 만삭인 산모가 하얗게 질려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신규 간호사인 내가 봐도 한눈에 심각한 순간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느라 버퍼링이 걸린 내 옆에서 응급실 선생님은 다급히 산모 상태를 읊어댔다.
38주 산모로 임산부요가 수업을 받던 중에 매번 같은 자세에서 아기 태동이 많았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태동이 없어 의아하게 생각해 다니던 병원에 방문했다가 병원 진료 대기 중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혈당은 400대를 넘어가고 혈압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망설일 틈도 없이 도플러를 배에 가져다 대었다.
만삭의 배에서 아기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부위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아기가 이리저리 숨을 공간이 더 없을 정도로 자궁에 딱 맞게 커져있기 때문에 여기 아니면 저기에서 들린다. 그런데 넓은 배를 아무리 뒤지고 찾아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교수님 불러주세요! 외치려고 돌아보는 순간 이미 교수님은 초음파 기계를 끌고 옆에 와계셨다. 네, 비켜보세요. 제가 볼게요. 차분히 얘기하시지만 애써 힘들게 삼키는 호흡에 급하게 달려오신 것이 역력했다.
안타깝게도 아기는 이미 심장이 멈춘 상태였고, 산모분은 그대로 응급제왕절개수술이 결정되어 15분 만에 수술실로 올라갔다. 나는 분만실로 다시 올라가 인큐베이터를 끌고 수술실로 달려갔다. 원래 인큐베이터는 태어날 아기들의 체온 유지를 위해 항상 38도로 온도를 설정하여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망한 아기를 데리러 갈 때는 보온기능을 끄고 차가운 상태로 데리러 가게 된다.
급하게 진행된 상황에 아직 더 차가워지지 못해 온기가 남아있는 인큐베이터를 끌고 수술방으로 들어가자 수술준비는 끝나있었고 평소 분만때와는 정반대로 아주 조용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주했다. 시끌시끌 분주하게 돌아가던 수술실도 매우 조용했고 태어날 아기를 위해 따뜻하게 데워져 있던 공간도 그날은 매우 추웠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 못하고 있는 것은 나 혼자였다. 그렇게 나는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이미 하늘의 천사가 되어버린 아기를 마주했다.
평소 분만 때는 태어난 아기를 보려고 수술방 내 의료진들이 기웃기웃, 일을 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은 아기에게 한 번씩 머물렀고 신규인 나는 그 눈빛들을 등으로 느끼며 조금의 부담과 또 조금의 든든함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차갑게 식어있는 아기를 마주한 그날 그 순간은 사람이 가득 찬 수술방 안에서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빽빽 울며 따뜻한 온기를 내 손에 전해주던 아기도 오늘은 조용했다. 조용히 잠자고 있는 듯했던 그 만삭의 아기는 그 존재가 명확하게 내 손에 느껴질 정도였고 그 무게감이 내 발끝까지 느껴지고 그 차가운 온도가 뼈까지 스미는 기분이었다.
분만실 간호사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 분만이라는 건, 새 생명이 건강하게 태어나는 분만이라는 건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구나. 나는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고 엄청난 결정을 해버린 것이구나.
단지 사람이 죽는 게 싫어서 분만실을 지원했다.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그날 뼈저리게 후회했다.
세상의 빛을 마주해 본 적이 없는 아주 작은 생명의 죽음은 단연코 그 어떤 죽음보다 슬픈 것이다. 뱃속의 아기를 먼저 보낸 부모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감히 그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너무 이른 시기에 너무나 큰 고통을 겪는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게 되어버렸다.
교수님을 만나 상황 설명을 들은 보호자는 설명이 끝난 후 황급히 수술실로 들어가는 교수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서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얹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죄송스러운 마음에 진행 상태와 간호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도중에도 마음은 어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수술 후 환자는 중환자실로 전실했고 그 이후로 환자와 보호자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날 퇴근 후 집에 와서 심장이 벌렁거리고 어쩔 줄 몰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멍하니 누워 밤을 새웠다. 밤새 그날 있었던 응급실부터 분만까지의 과정을 곱씹었다.
다음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파트장님께 부서이동 면담을 요청했다. 나약한 나를 인정하고 도망치려고 했다. 간호사는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았다. 내가 견뎌내기엔 이 부서가 이 직업이 너무 엄청난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버렸다. 하지만 겨우 적응한 신규를 놓칠 수 없었던 파트장님의 계속되는 설득으로 내 요청은 결국 반려됐고 나는 그대로 또 며칠을 앓다가 바쁜 업무와 일상에 치이다 보니 어느새 그날의 기억과 감촉들을 마음속에 흐리게 가두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분만실에서 근무를 몇 년간 지속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미숙했던 신규시절 만났던 그 아기는 결국 내게 간호사로 일하는 6년 동안 한순간도 잊히지 않고 계속 남겨져있는 가장 큰 멍이 되었다.
사진: Unsplash의 Janko Ferli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