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에서 일한지는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고액모금 업무를 시작한지는 올해로 6년차이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령을 받은 업무가 바로 '고액모금' 업무였다. 고액모금은 고액후원자를 찾고, 고액후원자님들이 주신 후원금으로 후원자님이 원하시는 사업을 진행하여 그 사업의 결과를 보고하고, 또 그렇게 큰 후원금을 내신 분들을 기관의 VIP인, 고액후원자로서 예우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그동안 NGO 마케팅 업무를 안해본 건 아니었지만 '고액'이라는 단어가 붙어서일까, 뭔가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처음에 맡았던 업무가 고액후원을 고민하고 우리 기관의 문을 두드리신 후원자님을 상담하는 일이었다. 나는 상담문의가 들어오면 두근두근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단 옆에 다른 직원이 있는 지를 살피는 일이었다. 나의 어설픈 대화기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은 어떻게 상담하는 지 귀를 쫑긋 세우며 그들의 이야기를 몰래 받아적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십번 혼자서 시뮬레이션을 한 뒤 후원자님께 전화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었다. 그 만큼 그 일은 나에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올해 초,우리팀에 새로온 직원들에게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 나의 이런 경험을 나눠주었더니 다들 맞장구 치며 공감했다. 6년차인 나 역시 고액후원자님과의 만남에 당연히 설레임도 있지만 아직도,여전히 걱정되고 긴장되노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첫 상담해서 처음으로 후원금을 내주신 후원자님의 성함을. 포항에 계신, 권씨 성을 가지신 후원자님이셨는 데 나의 어설프고 버벅거리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1800만원의 식수후원금을 선뜻 내주셨다고. 지금도 감사하다. 후원자님의 나눔 여정 시작에 내가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영광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다양한 고액후원자님들과 소통했다. 직접 고액후원자님들을 만나 뵙기도 했고, 전화로는 수도 없이 소통했다. 때로는 후원자님의 사업이 지연되어서,또는 후원자님의 불만족에 무조건 사과의 말을 드려야 하기도 했고, 때로는 후원자님의 후원금으로 인해서 지어진 학교와 그곳에서 즐겁게 공부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후원자님과 함께 환호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후원자님을 직접 모시고 아시아, 아프리카의 현장을 찾아 후원자님으로 인한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직접,그리고 함께 목도하기도 했다.
5년동안 이 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액후원금을 받는다는 것은, 후원자님의 삶의 일부를 받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받은 그 후원금은 후원자님의 피와 땀의 결과물이기도 했고, 몇년동안 모으고 모은 적금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또는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녀의 마음이기도 했다.
사실 고액모금은 그래서 어려웠다.그리고 무거웠다. 일단 후원금 자체가 크고 무거우며, 이 후원금 안에는 후원자님의 인생이 깊이 녹여져 있어서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무거운 후원금을 소중히 사용하여 가능하면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내야하는 책임감으로 인해 나의 어깨가 무거웠다.
사실 5년을 보내며 너무 무겁고 늘 긴장해야하는 순간들 때문에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고액후원자님들을 만나며 그들이 바라보는 인생의 가치관을 듣는 순간과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귀한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임을 깨닫게 해드리는 일들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분들께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직원이자 파트너가 되고싶었다. 그들의 생각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며 당신들로 인해 세상이 조금은 나아지고 있음을 더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나은, 좀 더 전문성 있는 '고액모금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앞으로의 글들은 고액모금가로서의 나의 일상과, 고액모금 업무를 하면서 느끼는 나의 마음, 고액모금가의 전문성을 쌓기 위한 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이 후원자님께 드리는 제안 하나에도 깊은 고민과 진심을 담을 줄 아는 나만의 철학이 있는 '고액모금가'로 자라나는 여정이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