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악기군(群)을 마주하고 멋지게 바통을 흔드는 사람은 과연 오케스트라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가? 왜 저 사람은 공연 내내 팔만 흔들다 들어가는데 그 많은 연봉을 받는가?
지휘자는 박자 만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총보를 읽고 작곡자의 의도를 분석하고 음악적으로 해석한 것을 가지고 단원들과 소통하여 오케스트라가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 사람이다.
지휘자에 따라 음악도 오케스트라의 소리도 아주 미묘하게 변화한다. 같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라도 조성진의 연주와 임윤찬의 연주가 다른 것처럼 지휘자마다 본인의 색채가 있다.
“첼로 독주가 같은 빨간색을 얼마나 짙고 연하게 채색할지 고민하는 일이라면, 오케스트라는 모든 색이 어울리는 무지개를 빚어내는 것이다” -장한나(첼리스트, 지휘자)
솔로 연주자는 자기 팔을 흔들어 자신을 표현하는 연주를 하지만 지휘자는 자신의 팔로 남의 팔을 움직여 연주를 해야 한다. 이로 인해 생기는 갈등과 번뇌는 피할 수 없는 지휘자의 직업적 숙명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젊은 단원부터 나이 지긋한 단원들까지 고루 포진해 있지만 대체적으로 20대 초반의 지휘자보다는 나이와 경험이 훨씬 많다. 이제 갓 콩쿠르에 입상해서 데뷔를 하는 젊은 지휘자가 있다면 그가 무엇을 시도하든 오케스트라에서 크게 환영받기 힘들 것이다. 단원들 중에는 그 곡을 지휘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연주해서 수 백 번의 경험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어린 지휘자가 데뷔하면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말에 잘 따라 주지 않아 애를 먹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지금은 유명 지휘자가 되었지만, 한 아시아계 남성 지휘자가 유럽의 유명한 교향악단에 대타로 데뷔를 할 기회를 얻었을 때 대처한 일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젊고 아시안인 그를 단원들이 환영할 리가 없다는 판단으로 '리허설 없이 바로 본공연'으로 시작한 것!
리허설 없이 무대로 바로 오르는 지휘자를 단원들은 긴장해서 쳐다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그날의 데뷔 무대는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한다. 오케스트라는 살아있는 생물이라 새로운 지휘자에게 반항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좋은 방향으로 가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지휘자와 설령 불화가 있더라도 무대에선 프로답게 서로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다.
“프로와 프로끼리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지휘대에 올라서 10초 안에 자기만의 해석을 보여주지 못하면 오케스트라에 잡아먹히고 마는 것이 지휘자의 운명” -장한나(첼리스트, 지휘자)
오케스트라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지휘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음악성과 리더십이다. 음악성에서 밀리면 리더십도 잃게 된다.
지휘자 아르투오 토스카니니는 모든 악보를 암보로 지휘했다. 그는 117개의 오페라와 480개의 관현악곡의 레퍼토리를 보유했는데 그 모든 악보를 암보했다. 이렇게 지휘하는 지휘자는 상당히 드물지만 이 정도가 되면 단원들이 절대 지휘자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카리스마의 리더십으로 베를린 필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있다. 카라얀은 단원 발탁부터 리허설까지 독재자 스타일로 밀어붙여 단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 시장을 전체적으로 키우며 상업적인 대성공을 이루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이런 카라얀을 굉장히 불편해하기도 했지만 음반 판매와 티브이 출연료로 고수익이 생기자 만족하는 단원들도 많았다고 한다. 카라얀의 사망 이후 베를린필에서는 여러 유명한 지휘자가 물망에 올랐지만 단원들의 투표로 당시로선 의외의 인물인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임명되었다. 아바도와 연주를 해 본 단원들이 '민주적'인 리더십의 아바도를 베를린 필의 새로운 지휘자로 투표했다. '마에스트로'라고 불리길 원하던 카라얀과 달리 '그냥 클라우디오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했던 아바도. 이 둘은 여전히 존경받는 지휘자로 남았다.
지휘자는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모든 단원은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원래 민주적이기 힘든 자리다. 소통은 민주적으로 할 수 있으나 결정은 혼자 내린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부악장- 수석- 부수석 - 일반 단원으로 구성되는데 철저하게 책임이 분담되며 지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월급도 순서대로 정해지는데 맡은 일과 책임이 다르기에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
오케스트라는 작은 국가와 같다. 하나의 리더를 두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화합이 되기도 하고 분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휘자의 리더십을 보면 그 오케스트라의 미래가 보이기도 한다.
*서울시향을 세계적인 수준의 오케스트라로 도약하게 만든 정명훈의 브람스 교향곡 1번을 감상해보자. 지휘가 아주 우아하다. 새로 취임하는 지휘자 얍 판 츠베덴의 서울시향도 기대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MCYXSIumox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