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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Aug 28. 2020

집착을 버려야 할 때, <무사 쥬베이>

무사 쥬베이(1993)



우리 집은 거실 한쪽 벽면이 다 서가다. 빼곡하게 책이 꽂혀있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새 책을 꽂을 자리가 부족하다. 오래된 책들을 버려야 하는데 차마 모진 마음을 내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는 참에 서재 한 칸을 차지한 DVD 컬렉션이 눈에 띄었다. DVD 플레이어에 전원을 넣은 지도 어언 몇 년인가. 그래, 이참에 DVD를 정리하자. 버리는 것도 이제는 쉽지 않다. 분리수거를 위해 비닐을 벗기고 종이 표지를 빼내고 플라스틱만 남긴다. 그러다 <Ninja Scroll> DVD를 봤다. ‘아, 수병위인풍첩!’


1996년도에 MBC에 함께 입사한 동기들 중에는 영화광이 많았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찍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방송사 입사한 친구도 있고, 나처럼 영상 제작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에 피디가 된 사람도 있었다. 동기들끼리 모여 영화 이야기를 하다 최고의 애니메이션을 꼽을 때,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대면, ‘음.......’했고, <아키라>를 이야기하면 ‘오홀!’하는 정도였는데, <수병위인풍첩>을 말하면, ‘앗!’했다. ‘저 친구, 내공이 상당한 고수로군!’


1993년에 가와지리 요시아키가 원작, 각본, 캐릭터 원안, 감독을 모두 맡아 제작한 성인용 애니메이션인데, 노출의 수위가 높고 폭력 묘사도 거침없다. 1990년대 중반에 이 영화를 무협 활극 애니메이션이라고 수입했던 분이 음란물 판매 혐의로 감방에 가기도 했단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여행을 갔다가 <Ninja Scroll>이라는 이름으로 영어 더빙판 DVD가 나온 걸 보고 냉큼 샀다. 어렵게 구했고, 나름 추억이 깃든 물건인데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다 왓챠에서 검색해봤다. 있다! <무사 쥬베이>!


주인공 쥬베이는 떠돌이 닌자다. 쇼군이 하사한 보검을 마을의 보물로 간직한 시골에 어느 날 좀도둑이 들어 칼을 훔쳐 간다. 200냥을 내놓으면 보검을 돌려주겠다고 하지만, 가난한 농군들은 대신 쥬베이를 고용한다. 그는 50냥에 좀도둑을 잡아 칼을 되찾아준다. 도둑들은 쥬베이를 비웃는다. 만금을 주고도 팔 수 있는 보검을 어찌 푼돈에 돌려주냐고. 천하의 보검을 가진 자는 모든 이의 표적이 된다. 목숨을 보전하는 길은 욕심을 버리는 길이다.


곤경에 처한 여인을 우연히 구한 탓에 쥬베이는 귀문 8인조와 원수가 된다. 그들은 절세 무공을 자랑하는 악랄한 고수들이지만 쥬베이를 당해내지 못한다. 지나친 욕심 탓이다. 연인에 대한 독점욕이 강한 자는, 타인의 질투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자신의 검술이 천하제일이라 여기는 자는 바로 그 자부심 때문에 죽는다. 내가 집착하는 허명, 내가 집착하는 돈, 내가 집착하는 지위가 바로 나의 약점이 된다. 고로 천하제일을 꿈꾼다면 욕망을 버려야 한다.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DVD 한 장을 버리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집착을 끊어내는 게 이렇게 어렵다. 이제 나는 수십 년간 모은 영화 컬렉션을 버리는 비운의 덕후가 아니다. 탐욕을 끊어내는 떠돌이 닌자다. DVD여, 안녕, 내게는 왓챠가 있단다.



무사 쥬베이, 지금 보러 갈까요?


김민식 / MBC 드라마 PD


MBC 드라마 PD입니다. <뉴논스톱>, <이별이 떠났다>,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했어요.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매일 아침 써봤니>,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도 집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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