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 원 아이드 잭(2019)
동네 도박장에서 발군의 카드 실력을 자랑하던 도일출(박정민 역)은 그날도 칩을 잔뜩 딴 뒤 털보(이지훈 역)에게 “지금까지 번 돈이 1,000만 원이 넘는다”고 자랑을 했다. 털보가 “학생이 그런 깡으로 공부를 했으면 공무원 시험에 벌써 붙었겠다”고 핀잔을 주자 일출은 한심하다는 듯이 대꾸한다.
일출 : “아이고, 요즘 누가 공부를 깡으로 하나?”
털보 : “그럼 뭘로 하는데? 머리?”
일출 : (칩을 들어 보이며) “다 이걸로 하는 거지. 가진 놈들은 출발점부터가 달라요. 부모 잘 만나서 어렸을 때부터 학원 댕기고, 과외하고, 유학 가고, XX놈들. 대학까지 맘대로 가는 새끼들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나? 나 같은 흙수저가.”
털보 : “그렇다고 노름을 하냐?”
일출 : “아 얼마나 좋아? 금수저나 흙수저나 카드 일곱 장 들고 치는 거 똑같은데. 훨씬 해볼 만한 거 아냐?”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사회가 불평등해도 도박은 하면 안 되지! 그런데 도박을 안 하면 이 불평등한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나? 그래서 도일출은 똑같이 카드 일곱 장 들고 치는 포커에 목숨을 건다. 그래도 도박은 아니지!!
대를 물리는 이 지독한 불평등은 우리 청년들을 이렇게 도박으로, 주식으로, 비트코인 투기판으로 내몬다. 몇 년 전 정부가 비트코인 투자에 대한 규제를 발표했을 때 청년들이 터뜨리는 불만은 “유일한 계급 상승의 기회를 정부가 막았다”는 것이었다. 이 사회가 너무 불평등한데, 비트코인 투자는 그나마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이야기다.
프랑스의 천재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자신의 명저 『21세기 자본』에서 이런 현상을 ‘라스티냐크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질타했다. 라스티냐크는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의 소설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이다. 시골 출신의 총명한 청년 라스티냐크는 인생 역전을 꿈꿨다. 그런데 이를 위한 선택지가 두 가지다. 하나는 열심히 공부해 법관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속칭 ‘후리기 기술’을 연마해 부잣집 딸을 꼬시는 것이다. 라스티냐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선택의 정답은 시대마다 다르다. 라스티냐크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에서의 정답은 단연 후자, 즉 후리기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다. 당시 라스티냐크가 노오력을 통해 상위 1%(법관)가 됐다면 그의 소득은 하위 50%의 10배쯤 됐다. 요즘으로 치면 연소득 한 4억쯤 번다는 이야기다.
반면 후리기 기술을 연마해 상위 1%(부잣집 사위)가 됐다면 그의 소득은 하위 50%의 25배나 됐다. 요즘으로 치면 연소득 10억쯤 된다. 4억과 10억, 1년에 6억씩 차이가 난다. 10년이면 60억, 30년이면 180억이다. 이건 뭐 생각을 해 볼 필요도 없다. 라스티냐크는 무조건 공부 대신 후리기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반면 라스티냐크가 19세기가 아닌 1950년대 미국 청년이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때도 라스티냐크가 노오력을 해 상위 1%에 들면 요즘 돈으로 연 4억쯤 번다. 이까지는 달라지는 게 없다.
하지만 이때 라스티냐크가 후리기 기술을 연마해 부잣집 사위가 됐다면, 연소득은 2억에 머무른다. 1950년대 미국의 상속세율은 무려 77%로 부모로부터 돈을 물려받아봐야 대부분을 세금으로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라면 라스티냐크는 당연히 후리기 기술 대신 공부를 했을 것이다. 돈 때문에 마음에 들지도 않는 배우자를 꼬실 필요도 없다. 돈도 지키고 사랑도 지킬 수 있다.
이 차이가 바로 세상의 모습을 결정한다. 금수저라는 이유만으로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노오력이 아닌 후리기 기술을 선택한다. 반면 상속세율을 높여 부의 대물림을 막으면 사람들이 노오력을 통한 성취에 집중한다.
도일출은 21세기 한국의 라스티냐크다. 그는 공부 대신 포커판을 선택했다. 이걸 비난할 수 있을까? 공부를 해서 성공할 확률보다 도박을 배워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은데? 해도 안 될 일에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공평하게 누구나 카드 일곱 장 들고 치는 포커에 매진하는 게 도일출에게는 더 합리적 선택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 모두 도박을 시작합시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당연히 아니다. 왜 지금 청년들이 도박에 빠지고, 비트코인에 열광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공부 대신 도박이나 비트코인에 열광한다면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부의 대물림이 신분을 결정하는 세상을 방치한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그들에게 “노오력을 해야지!”라는 꼰대 훈계 짓을 멈춰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금수저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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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 민중의소리 기자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네이버 금융서비스 팀장을 거쳐 2014년부터 《민중의소리》 경제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두 자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가치 있는 행복을 물려주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