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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즈하루 Jun 11. 2020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온 내 마음

하루키로 읽는 재즈 8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온 내 마음

토니 베넷


때때로 생존은 재능이 되기도 한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그렇다. 1917년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인류의 달 착륙, 베를린 장벽 붕괴 같은 20세기 역사적 사건을 온 몸으로 겪어냈다. 그리고 얼마간의 21세기를 경험한 2012년 10월,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역사학자로서 그의 가장 큰 재능을 장수(長壽)라고 표현했다. 


에릭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극단의 시대>(1994) 등을 쓴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지만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재즈 비평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 번역된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가 국내에서 귀한 재즈 평론서가 되어주었고, 이 책에 실린 글을 재즈평론가 황덕호가 번역해 2014년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으로 선보였다.


재즈계의 산 역사, 토니 베넷


무엇 무엇의 산 역사. 진부하지만 관용적 표현이란 게 그렇듯, 척하면 척이다. 이 글을 쓰는 2019년 11월을 기준으로 재즈계 산 역사를 꼽는다면 누구겠는가. 정열적으로 색소폰을 불던 소니 롤린스(1930년생)마저 활동이 뜸해진 지금, 대기만성형 뮤지션 리 코니츠(1927년생, 글을 쓰고 난 후인 2020년 4월 15일 사망했다)와 기록갱신형 뮤지션 토니 베넷(1926년생)만이 남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했지만 걸어온 길은 달랐다. 리 코니츠가 무명 시절을 견디며 묵묵히 재즈의 길을 간데 비해 토니 베넷은 스탠더드 보컬로 데뷔부터 화려한 일생을 보냈다. 솔직히 말한다면, 리 코니츠에게 한 표를 주고 싶다. “리 코니츠라는 이름은 들어봤는데...” 싶지만 70년 동안 리더작으로 발표한 것만 150여 장이다. 화려함은 없지만 정직하고 단단한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품위 있는 재즈다. 


아차, 지금은 토니 베넷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토니 베넷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트랜디, 댄디, 쎄씨, 젠틀 같은 영어 표현이다. 한국어로는 그 멋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렵다. 여하튼 미국식으로 멋들어진 남자다. 


토니 베넷은 1952년 [Because Of You]로 데뷔해 미국 스탠더드 팝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록의 강풍에 쓰러지기도 했지만 코카인 중독을 극복한 1970년대에는 로저스&하트, 프랭크 시나트라, 듀크 엘링턴 같은 고전을 소화하며 트래디셔널 재즈 보컬로 입지를 굳혔다. 2000년대에는 듀엣 시리즈로 다시 한 번 인기를 얻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부른의 듀엣 곡 ‘Body And Soul’, 레이디 가가와 부른 ‘Cheek To Cheek’ 등이 재즈를 듣지 않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통한 것이다. 2018년에는 조지 거쉰 탄생 120주년을 맞아 다이애나 크롤과 함께 [Love Is Here To Stay]을 발표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는 1982년 쓴 단편 <월간 강치문예>부터 2017년 발표한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35년이나 토니 베넷이 등장한다. 장편 소설 <노르웨이의 숲>과 <1Q84>, 에세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무라카미 라디오 3)>,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그중 <월간 강치문예>에서는 토니 베넷이 ‘White Christmas’를 부른다. 빙 크로스비가 아닌 것으로는 드물게 등장하는 버전이다. 꿈속에서 ‘나’는 테이블 다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오야마 거리 건너편에 설치된 특설 무대에서는 토니 베넷이 ‘White Christmas’를 부르고 있다. 아무 근거 없이, 토니 베넷이 테이블 다리인 나를 향해 노래를 부른다고 확신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온 내 마음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는 토니 베넷에 대한 인상적인 문장이 등장한다. “<시카고> 외에도 이 지방에서는 이 곡, 하는 유명한 곡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토니 베넷의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온 내 마음>, 랄프 샤론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피아노 인트로가 머리에 떠오른다.” 이 문장을 읽은 뒤로는 아련한 분위기와 노래가 한 덩어리로 되어 있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가 영롱한 피아노 연주나 느긋한 보컬 같은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띠게 되었다. 


하루키가 언급한 랄프 샤론(Ralph Sharon, 1923-2015)은 영국계 미국인 피아니스트로, 1963년 [I Wanna Be Around]부터 약 13장의 리더작을 냈다. 그렇지만 그의 재능은 보컬 반주에서 더욱 두드러져서 1957년부터 1965년까지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감독으로 토니 베넷의 음악에 재즈적인 향취를 불어넣었다. 잠시 헤어졌지만 토니 베넷이 재기할 때 다시 합류해, 샤론이 은퇴하는 2002년까지 함께 했다. 그들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말할 것도 없이 1962년 작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다. 애잔한 상념에 젖는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비롯해 호방한 보컬을 선보이는 ‘Once Upon A Time’, ‘The Best Is Yet To Come’ 등 12곡의 스탠더드와 올드팝 명곡이 실려 있다. 랄프 샤론의 섬세한 피아노 연주 위에서 토니 베넷은 다채롭고 풍성하게 노래한다. 토니 베넷은 이 앨범으로 그래미어워드 올해의 레코드와 남성 보컬 부문을 수상했다. 


아직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의 마지막 곡은 ‘The Best Is Yet to Come’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토니 베넷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면 이 노래를 떠올릴 것이다. 아직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고 노래했지만 언제나 최고였던 남자 잠들다, 라고.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Columbia / 1962

Tony Bennett (v), Ralph Sharon (p), The Count Basie Orchestra 

1.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2. Once Upon A Time 

3. Tender Is The Night 

4. Smile 

5. Love For Sale 

6. Taking A Chance On Love  

7. Candy Kisses 

8. Have I Told You Lately? 

9. Rules Of The Road 

10. Marry Young 

11. I'm Always Chasing Rainbows 

12. The Best Is Yet To Come


(재즈피플 2020년 1월호)


https://youtu.be/r6DUwMnDx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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