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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즈하루 Jun 11. 2020

끝은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였다

하루키로 읽는 재즈 9

* 일부 소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끝은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였다

빌 에반스 [Waltz For Debby]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코 부부는 1971년 결혼했다. 둘은 와세다 대학에서 만나 학생 시절 결혼했고 졸업 후에는 함께 재즈 카페를 운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단하고 전업 작가가 되면서 하루키는 글을 쓰고 요코는 편집자이자 사진작가로 협업하고 있다. 공공연하게 알려졌듯,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다. 그런데 2018년 11월 하루키가 모교 와세다 대학에 자신의 자료를 기증하며 이렇게 언급한다. “나에겐 아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없어지면 그 다음엔 (자료들이) 흩어질지 몰라서 그것도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공식적인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작가이기도 하지만)에서 딩크족이라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하루키 소설 속 아이들


무라카미 하루키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후속작 <1973년의 핀볼>에는 스무 살이 된 ‘나’가 등장한다. 친구 ‘쥐’와 함께 하릴없이 맥주를 마시며 핀볼을 하는 나는 하루키 자신이다. 대학 시절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1960년대 도쿄 대학을 중심으로 시작된 학생운동)에 영향을 받은 하루키는 초기작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는 청춘들을 많이 그렸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하고 아이를 낳지 않은 하루키에게 부모-자식 이야기는 주요 테마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나’의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하루키도 작가로 성장해가며 경험해야 아는 것들만 쓰지는 않았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는 뱃속아이를 잃은 주인공 시마모토가 등장하고, <해변의 카프카>에는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15세 소년 다무라 카프카가 나온다. 카프카가 차고에서 찾은 프린스나 듀크 엘링턴 LP를 감탄하며 듣는 것은 너무 하루키 취향이긴 하지만. 그리고 지난 30년 간 일본 내에서 최고의 작품이라 손꼽히는 <1Q84>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아오마메와 단고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아남아 서로를 찾는 것은 유년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어린 아이(자녀)가 등장한다. 쓰쿠루는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된 자신의 과거를 쫓아 핀란드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만난 친구 에리 두 딸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마 세 살 정도 일 것이다. 옆에는 조금 큰 소녀가 있었다. 동생보다 두세 살 위다. 둘 다 같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같은 비닐 샌들을 신었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기묘한 부녀(父女)와 얽히고설킨 뒤 ‘나의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게 된다. 무로는 더 이상 정서적으로 메마른 부모 아래서 자라나지도, 어른이 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된다. ‘은총의 한 형태로’ 태어난 아이는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그의 딸이다.  


빌 에반스 ‘왈츠 포 데비’


하루키 소설에 아이를 위한 테마 곡을 하나 고른다면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다. 빌 에반스가 당시 4살이던 조카 데비를 보고 쓴 곡이다. 푸르른 언덕에서 머리칼을 흩날리며 뛰는 사랑스러운 아이, 그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고스란히 음악에 담겼다.  


이 곡은 1956년 [New Jazz Conceptions]에서 첫 선을 보인 뒤 빌 에반스도 여러 차례 녹음했다. 가장 대표적인 버전은 1961년 6월 25일 빌리지 뱅가드 공연 실황을 담은 [Waltz For Debby]로, 트리오 연주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녹음 후 스콧 라파로가 사망해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연주가 되었다. 이후 데이빗 베누아, 오스카 피터슨, 칙 코리아와 게리 버튼 듀오 등도 연주하며 재즈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레코드판을 걸고 그것이 끝나면 바늘을 올려 다음 레코드판을 걸었다. 한 바퀴 다 틀고 나서는 다시 처음의 레코드 판을 걸었다. 판은 전부라야 여섯 장밖에 없었고, 시작은 비틀스의 <사전트 페퍼즈 론리 하츠 클러 뺀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고, 끝은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Waltz For Debby)>였다.” <재즈 에세이>에는 친절하게도 [Waltz For Debby] 듣는 방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앨범 <왈츠 포 데비>는 CD말고, 옛날처럼 몸을 사용하여 LP로 듣는 것이 좋다. 이 앨범은 한 면에 세 곡이 들어 있는데, 한 면이 끝나면 일단 바늘을 들고 물리적으로 한숨을 돌려야 비로소 본래의 <왈츠 포 데비>라는 작품이 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하루키는 모든 트랙이 멋지지만 ‘My Foolish Heart’를 가장 좋아한다고 덧붙인다. 


이 외에도 장편 <댄스댄스댄스>와 단편 <쿠시로에 내린 UFO>, <잊혀진 왕국>, <하나레이 만>에서도 빌 에반스의 음악을 듣거나 그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쿠시로에 내린 UFO>(1999)에서는 주인공 고무라가 결혼 전부터 수집했던 비틀즈와 빌 에반스 앨범을 이혼한 아내가 가져가버린다. 그러자 하루키 소설에서도 꽤 오랫동안 빌 에반스가 언급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죠? 최근 영화로도 제작된 <하나레이 만>(2005년 <도쿄 기담집>에 수록된 단편)에서 다시 빌 에반스 연주가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해되시길


빌 에반스는 조카 데비뿐 아니라 딸 맥신을 위해 ‘Maxine’을 쓰기도 했다. 황덕호의 <다락방 재즈>를 인용하면, 빌 에반스는 1973년 네넷 에번스와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네넷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맥신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에번이 있었다. 리치 바이락은 당시의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매우 행복해했고, 실제로 완전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정말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시기 발표한 [New Conversations]에는 딸에게 보내는 ‘Maxine’, 아내를 위한 곡 ‘For Nenette’, ‘I Love My Wife’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우울증과 약물중독으로 그 행복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가족은 그에게 삶의 희망이 되어주었다. 

빌 에반스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에 깊숙이 들어온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음악가다.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행복해했다. 그 곡들은 진심이 담겨있기에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다. 독자 분들도 2020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듯함을 나눌 수 있는 한 해되시길. 


Bill Evans Trio

[Waltz For Debby]


Priverside / 1962

Bill Evans (p), Scott LaFaro (b), Paul Motian (ds)

1. My Foolish Heart 

2. Waltz for Debby 

3. Detour Ahead

4. My Romance 

5. Some Other Time 

6. Milestones 


(재즈피플 2020년 2월호) 


https://youtu.be/dH3GSrCmz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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