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날은 맑았고 하늘은 높았다. 자라섬의 가을 석양이 붉게 내려와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에서 기획한 ‘디바스 : 박성연 그리고 말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지난 날 내 손에서 모래처럼 흘려버린 그 많은 시간들은 내 것 아닌 것 같아. 꽃처럼 어여쁜 날 속절없이 흘려버린 날, 날 떠나버린 그 시간들 어디서 다시 만날까.” 오래 전 들었던 노래가 흐르자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기억을 쫓는 사이 박성연 선생님이 휠체어에 의지해 무대에 올랐다. 눈을 감자 어둠이 밀려왔다. 어디서 본 듯한 밤거리, 음악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 끝에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그 장소를 확실하고 자세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는 재즈 바’가 있었다. 무라카미 류가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에서 찾아냈던 그곳. 아련히 들려오는 ‘Summertime’에 조금, 눈물이 났다.
박성연 선생님은 “내가 가장 많이 부른, 천 번도 넘게 불렀을 곡”이라며 ‘I’m a Fool to Want You’의 저음을 내뱉었다.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재즈를 하기 위해 태어났고 재즈를 부르며 완성됐다. 선생님에게 재즈가 어떤 의미였을지 짐작만 할 뿐이지만 무대 위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디바스 : 박성연 그리고 말로’는 다시 나를 2003년의 기억으로 데리고 갔다. 말로의 [벚꽃지다]가 발표된 해다. 그해 7월 한전아츠풀센터(현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린 [벚꽃지다] 발표 단독 공연은 내가 처음으로 표를 사서 본 공연이었다. 피아노에 임미정, 베이스에 전성식, 기타에 정수욱, 드럼에 크리스 바가,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이 무대에 올랐다. 지금이야 라인업 좋다고 감탄하지만 그때는 그것도 몰랐다. 대신 혼자 간 공연장이 낯설고 두려워 의자에 푹 기댔던 기억이 나고, 검고 큰 무대를 휘감던 노랫가락의 흔적도 기억난다.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90년대 한국 재즈 연주자와 그에 대한 감상자는 극소수였다. 색소포니스트 이정식이 1997년 색소포니스트 이정식이 피아니스트 케니 배런, 베이시스트 론 카터, 드러머 루이스 내시, 트럼페터 테루마사 히노와 함께 한 [이정식 in New York]과 1999년 <화두>를 발표하며(이 앨범들은 당시로선 획기적이었고 지금 들어도 훌륭하다) 물꼬를 트는 듯했지만 그 앨범들마저 몇 년 후에 재발견되고, 또 몇 년 후에 재발견되는 운명을 견뎌야했다.
내가 잡지에서 일한 2003년은 한국 재즈의 부흥기가 시작되던 때다. 1994년 [사랑을 그대 품안에]가 남긴 재즈 광풍은 사라졌지만 미국에서 재즈를 공부한 연주자들이 하나 둘 귀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재즈 클럽과 공연장, 대학 강단에 자리를 잡았고 그와 함께 한국인으로서 재즈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연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등이 논의되었다. 재즈에 한국 리듬을 실었고 한국어 가사를 붙였다.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억지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이내 ‘한국인’은 ‘나’라는 자기개념으로 대치되었고 한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갖춘 연주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의 완성도는 높아졌다.
[벚꽃지다]는 그 화두를 던진 작품이었다. 이 음악이 재즈냐는 질문은 받아봤지만 이 음악은 재즈가 아니라는 비판은 듣지 못했다. 다시 말해, 재즈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 있었다. 그런 음악이 바로 재즈였다.
재즈는 세계의 음악이 되었다. 수많은 나라에서 재즈를 연주한다. 그리고 그들이 연주하는 것이 미국식 재즈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나는 한국 재즈, 아니 한국 재즈 연주자들을 좋아한다. 그들의 음악에는 내가 경험했던 문화와 내가 동경했던 문화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음악 자체든 음악에 대한 해석이든, 내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벚꽃지다]는 나에게 봄을 알리는 노래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 계절에 꽃잎 날리는 ‘벚꽃지다’를 듣는다. 입안을 구르는 단어들이 곱다. 노래가 참 좋다.
(재즈피플 2017년 12월호, 최종수정 19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