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로 읽는 재즈 12
무라카미 하루키는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에서 모던재즈쿼텟(MJQ)이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모습과 차분한 무대 매너가 ‘참 멋이 있었다. 동경했다.’고 이야기한다. “60년대의 옛 영화를 보다가 MJQ의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면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 속에 갇혀 있으나,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자유로운 영혼의 날개짓 소리가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이 바로 재즈였다고 새삼 나는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19 이야기. 코로나가 인해 전 세계인이 이동을 자제하자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영국에서는 관광객이 끊이질 않던 애비로드의 횡단보도를 새로 칠할 수 있었고, 인도 북부에서는 늘 뿌옇게 가려져 있던 히말라야 산맥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창을 활짝 여는 게 두렵지 않았다. 이렇게 파란 봄 하늘을 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코로나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2019년 8월부터 도쿄 FM에서 ‘무라카미 라디오(村上RADIO)’를 진행하고 있다. 직접 음악을 선곡하고 간단한 멘트를 하며, 독자들의 질문에도 답하는 개인방송이다. 하루키도 꽤 즐거웠는지 지금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진행하는 정기 방송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방송은 2020년 4월 26일, 번안 곡들을 소개한 13편 ‘언어 교환 송 특집’이다. 그런데 한달만인 5월 22일 긴급 편성으로 ‘스테이 홈(Stay Home) 스페셜 : 밝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한 음악’을 방송했다. 일본 내에서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인데, 하루키는 “조금이라도 힘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음악을 소개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선곡은 모던포크쿼텟의 ‘Look For The Silver Lining’을 시작으로 니나 시몬 ‘Here Comes The Sun’, 엘라 피츠제럴드 ‘Over The Rainbow’, 알 자로 ‘My Favorite Things’, 토니 베넷 ‘Put On A Happy Face’ 등 희망적인 노랫말을 담은 곡들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인상적인 곡은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Waitin' On A Sunny Day’다. 9·11 테러 이후 발표한 [The Rising]에 수록된 곡으로, 하루키는 주위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듣고 위로 받았다며 “음악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덧붙였다.
서른다섯 살, 계산사로 일하는 ‘나’는 노(老)박사에게 업무를 의뢰받는다. 하지만 일을 맡자마자 수수께끼 2인조에게 습격을 당해 부상을 입고, 노박사의 손녀로부터 살기 위해서는 도망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비현실적인 세계에 휩쓸렸지만 지금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배낭에 든 위스키도 꺼낼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나’는 위스키 마시는 장면을 상상한다. “청결하고 조용한 바와, 땅콩이 들어 있는 그릇과, 낮은 소리로 흐르는 MJQ의 ‘Vendome’, 그리고 더블 온 더 블록이다.” 1985년 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한 장면이다.
서른여섯 살, ‘나’는 전도유망하지는 않지만 초상화를 그려 그럭저럭 먹고 사는 화가다. 어느 날 아내가 외도를 했다며 헤어지자고 말한다. 헤어지더라도 친구로 지낼 수 있느냐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갑작스러운 통보에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차를 몰고 무작정 시내를 달린다. 비 오는 일요일 저녁이다. CD 플레이어에 꽂힌 셰릴 크로의 음악을 듣다가 전원을 끄고, 침묵을 참지 못해 틀었다가 다시 끈다. 그리고 글러브박스에서 찾아낸 MJQ의 앨범을 넣는다. [Pyramid]다. “밀트 잭슨의 기분 좋은 블루스 솔로를 들으면서 고속도로를 북쪽으로 똑바로 올라갔다.” 2017년 작 <기사단장 죽이기>의 한 장면이다.
30년 차이가 있지만 나란히 놓고 보니 상황이 비슷하다. 하루키는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지 않고 내용도 종종 잊어버린다고 한다. 두 소설도 의도했다기보다는 하루키가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을 때 모던재즈쿼텟을 떠올렸던 건 아닐지. 그것도 30년이나!
<기사단장 죽이기>에 흐르는 [Pyramid]는 모던재즈쿼텟이 1960년 애틀란틱에서 발표한 앨범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흐르는 ‘Vendome’이 첫 곡으로 연주되어, 흥미롭게도 두 소설을 한 앨범으로 만날 수 있다. 앨범에는 ‘Vendome’을 시작으로 레이 브라운이 작곡한 ‘Pyramid (Blues For Junior)’, 듀크 엘링턴의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MJQ의 대표곡 ‘Django’, 스탠더드 ‘How High The Moon’과 짐 홀의 ‘Romaine’이 각각 실려 있다. 1956년 [Django]의 성공 이후 지미 쥐프리, 오스카 피터슨, 소니 롤린스와 협연하며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던 그들이 ‘작정하고 내놓은 대중적인 앨범’이랄까. 선곡이나 연주에 있어서 딱 모던재즈쿼텟이다.
사실 하루키 소설에 모던재즈쿼텟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앞서 소개한 두 작품과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에 소개된 것 정도다. 그렇지만 가끔씩 모던재즈쿼텟의 연주가 들려올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너무 맑아서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 같은 때에.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에서 주인공은 한 달 전 태어난 새끼 캥거루를 보러가기에 알맞은 아침을 기다린다. 그 날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개인적인 볼일이 있는 날이 아니라, 아침에 깨어 창문을 걷었을 때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그런 날씨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밤새 내린 비가 먼지를 씻어주었고 따사로운 아침 햇볕과 바람이 거리의 물기를 말리고 있다. 사실 이 소설에는 스티비 원더와 빌리 조엘의 노래만 등장한다. 그런데 행간에서 모던재즈쿼텟의 연주가 들려온다. 어느 맑은 날, 그러니까 새끼 캥거루를 보러 가기에 좋을 법한 날 우연히 라디오를 튼다면 모던재즈쿼텟이 나와야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밀트 잭슨의 영롱한 비브라폰 연주가 하늘에 통- 하고 가벼운 파동을 일으키듯이.
코로나19로 인해 집 밖을 나서지 않게 되는 요즘. 창을 활짝 열고 있으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집안 곳곳을 깨우며 돌아다닌다. 바람에는 산의, 하늘의, 도시의 냄새가 섞여 있다. 바람에는 싱그러운 풋내가 난다. 이 풋내를 달게 들이마시면서도 마음 한켠이 무겁다. 밝은 내일은 올 수 있을까. 하루키는 코로나 특집 방송에서 마지막 곡으로 얼후 연주자 웨이웨이 우(WeiWei Wuu)의 ‘What The World Needs Now Is Love’를 선곡한다. 사랑이, 음악이,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라 믿기 때문이다. (끝)
Modern Jazz Quartet
[Pyramid]
Atlantic / 1960
Milt Jackson (vib), John Lewis (p), Percy Heath (b), Connie Kay (ds)
1. Vendome
2. Pyramid (Blues For Junior)
3.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4. Django
5. How High The Moon
6. Rom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