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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즈하루 Aug 26. 2020

그 남자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하루키로 읽는 재즈 13

그 남자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콜맨 호킨스와 벤 웹스터, 그리고 레스터 영  

   

“토렌스 LP 플레이어와 럭스맨 앰프. 소형 JBL 2웨이. (중략) 그는 오래된 재즈를 아날로그 레코드로 듣는 것을 옛날부터 좋아했다. 그것은 거의 유일한 ―그리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도 주위에 없는― 그의 취미였다.” - 단편 <기노>     


콜맨 호킨스와 벤 웹스터가 흐르는 작은 바, 기노     


나열된 오디오 기기가 조금 다를지언정, 이어지는 문장이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느낀다면 당신도 ’기노‘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과묵하고 성실하며, 재즈를 좋아하는. ‘기노’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2014년 발표한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단편이다. 재즈가 중요하게 쓰인다는 점에서 단편 <토니 타키타니>나 <렉싱턴의 유령>, <태국에서 있었던 일> 등을 떠올리게 한다. 


기노는 스포츠용품 판매회사에서 근무하는 영업사원이다. 출장에서 하루 일찍 돌아온 날, 기노는 아내와 자신의 직장 동료가 불륜 하는 걸 목격한다. 충격을 받았지만 ‘이상하게’ 그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느끼지 않는다. 대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행 가방을 싸서 집을 나온 후 생각한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오야마 네즈 미술관 뒤쪽에 있는 고즈넉한 곳에서 재즈 바를 운영하게 된 기노는 아트 테이텀의 피아노 솔로를 들으며 고독과 침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콜맨 호킨스 ‘Joshua Fit The Battle Of Jericho’, 빌리 홀리데이 ‘Georgia On My Mind’, 에롤 가너 ‘Moonglow’, 버디 드프랑코 ‘I Can’t Get Started’처럼 오래된 재즈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지낼 뿐이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라진 것도, 잊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기노는 테디 윌슨, 빅 디킨슨, 벅 클레이턴, 그리고 벤 웹스터의 아름다운 솔로가 있는 ‘My Romance’를 듣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간절히 그리워한다. 결국, 그는 눈물을 흘리며 상처를 받아들인다.      


하루키 작품 속 콜맨 호킨스와 벤 웹스터, 그리고 레스터 영    

 

콜맨 호킨스, 레스터 영, 그리고 벤 웹스터를 밥(bop) 이전 시대의 3대 테너 색소포니스트로 꼽는다. 하루키는 <재즈 에세이>에서 세 사람을 언급하며 “호킨스의 예리하고 수직적이며 야심적인 연주, 웹스터의 균형미있고 직접적이며 스윙적인 시심, 그리고 보다 자유로운 혼의 비상을 꿈꾼 영의 부드럽고 대담한 리듬, 그 뛰어난 음악들은 지금 들어도 결코 세월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의 음악을 즐겨듣고 소설에도 자주 인용한다.  


단편 <태국에서 일어난 일>은 콜맨 호킨스에 헌정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맨 호킨스의 애드립 라인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어 보라구. 그가 그 라인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무얼 말하려 하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봐. 그건 가슴 속에서 어떻게든 빠져 나오려 하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에 관한 이야기야. 그런 영혼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자, 들어봐. 들리지? 뜨거운 한숨이나 마음의 떨림이.” 과도하게 영적으로 표현해 ‘과연 그 정도일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재즈 색소포니스트 가운데 영적인 세계를 추구한 인물이 비교적 많은 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는 존 콜트레인. 그건 악기 탓일지...?


다른 작품에도 호킨스가 언급되지만 이렇게 칭송하지는 않는다. “콜맨 호킨스나 리 모건 따위를 들으면서 공항까지 유유히 운전하였다”며 ‘Stuffy’를 듣는 <댄스댄스댄스>, 델로니어스 몽크의 [Monk’s Music]에 콜맨 호킨스와 존 콜트레인이 참가해서 근사한 솔로를 들려준다고 이야기하는 <기사단장 죽이기> 정도다. 


다음으로는 벤 웹스터가 자주 등장한다. 장편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나’는 절도하다 걸린 제자를 데리러 마트에 간다. 담당 경비원은 ‘땅딸막한 체격’의 남자다. “방은 매우 더웠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바람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거리의 소음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신호 때문에 정지해 있는 대형 트럭이 말년으로 접어든 벤 웹스터의 테너 톤을 연상시키는 쉰 듯한 에어브레이크 소리를 냈다.” 경비원은 다부진 인상부터 벤 웹스터를 닮았다. 문장의 흐름은 그의 음악을 닮았다. 웹스터의 음악을 이야기하기 위해 쓴 문장이 아닐까 싶다. 이 외에도 이 외에도 장편 <애프터 다크>에 ‘My Ideal’, 단편 <기노>에 ‘My Romance’가 각각 흐른다. “벤 웹스터가 부는 ‘My Romance’의 아름다운 색소폰 솔로를 생각했다(중간에 두 번 스크래치가 들어간다. 치직, 치직).”


하루키는 세 명의 테너맨 가운데 레스터 영의 연주에 가장 큰 매력을 느낀다고 했지만, 작품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콜맨 호킨스를 칭송했던 <태국에서 일어난 일>에서는 JATP에서 레스터 영과 하워드 메기가 참여한 ‘I Can’t Get Started’가 흐른다. 이 곡은 주인공 사쓰키와 택시 운전사 니밋이 ‘재즈’를 공유하는 도화선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니밋이 VIP 택시 안에서 조그맣게 재즈를 틀자 사쓰키가 ’하워드 메기의 트럼펫, 레스터 영의 테너 색소폰’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니밋이 묻는다. “아, 선생님께선 재즈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좋아하십니까?” 


“재즈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좋아하십니까?” 지금이라면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세 명의 연주를 들으면서도 누군지 모르겠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그들을 구분하지 못해도 즐겁게 재즈를 듣는다. 나에게 세 테너맨의 미덕은 초보시절에도 재즈가 멋진 음악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음악을 듣다가도 그리운 마음에 돌아오면 묵묵히 받아주었다는 것에 있다.      


하루키로 읽는 재즈를 마치며     


2018년~2019년 사이에 방 하나를 가득 채웠던 책과 음반을 정리했다. 평생 들어도 못 들을 만큼, 은 아니었지만 읽고 듣는 게 부담이 될 만큼은 많았다. 모두 처분하면서도 하루키 작품은 나중에 읽어야지 하는 마음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군데군데 비워진 책장에 하루키 책만 남아있자 한권씩 꺼내 읽게 되었다. 전에는 단어로만 지나쳤던 재즈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키 소설에 이렇게 많은 재즈가 있나 싶었고, 내가 10년 넘게 재즈를 들었다는 게 실감났다. 새삼 재즈에 대한 하루키의 애정과 지식이 부러웠다. 


그렇게 하루키 작품에 나오는 재즈를 정리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게 ’하루키로 읽는 재즈‘다. 매회 하루키-재즈-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했지만 다시 하루키를 읽고, 재즈를 듣는 건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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