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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Apr 06. 2023

여행중독

떠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도 한때 여행중독에 지독하게 걸린 적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중독까지는 아니지만, 가지 않으면 가끔 사는 게 힘이 부치기도 한다.


내가 여행에 본격적으로 맛을 들인 때는 미국에서 거주하면서부터였다. 아무래도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미국 내의 여러 주를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보니 (이것도 부지런해야 하는 짓이지만) 미국에 있는 아는 지인집부터 시작해서 이곳저곳 참 많이 돌아다녔다.


어쩌면 모든 세상의 것들을 온몸으로 흡수하기 좋은 이삼십대의 여행은 수많은 새로운 것들을 그 어떤 때보다 쉽게 받아들였고 배웠다. 아직도 그 습관은 여전히 남아있는지 시간 날 때마다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요즘은 가끔 옛날 같지는 않아서 결국 무리하다 드러눕기 일쑤지만 말이다.


한국에 돌아와 30대를 온종일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했다.

커리어에 올인한 시기라 사실 장기 여행은 꿈도 못 꿨다.

패션, 의류업계는 항상 빠르게 돌아간다. 시간을 다투고 납기를 맞추는, 그리고 과정 중에 매번 변수가 많은 일이라 어느 일이나 그렇겠지만 특히나 이 바닥의 일은 숨 쉴 틈이 없이 꽤나 바쁘다. 특히 MD는 "뭐든지 다한다"라고 할 정도로 해야 할 일이 정말 지독하게 많다. 해외 컨텍이 많을 경우는 정말 밤낮 안 가리는 시차와의 싸움에 때와 장소, 시간에 상관없이 급하게 연락할 일도 참 많다. 그나마 내가 다녔던 회사는 국내의 일반 기업들 보다는 눈치 안 보고 원하는 날 급작스럽게 시간이 나면 연차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편이었지만, 대신 모든 일에는 그 즉시 해결하지 않으면 빠르게 돌아가는 루틴상 문제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그만큼의 책임이 따랐기에 여유 있는 휴가를 즐기기는 정말 어려웠다. 큰 맘먹고 추석 연휴를 끼고 일주일 동안 뉴욕에 한번 다시 가본 것 이외에는 일하는 동안 나의 휴가는 거의 2박 3일 혹은 길어야 3박 5일 정도였다. 그나마 그 짧은 시간에는 가까운 동남아나 아시아라도 갈 수 있었지만 코로나가 터진 뒤로는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코로나 기간 동안 처음으로 틈틈히라도 하던 여행을 오랫동안 손에 놓았다. 회사 내 엄청난 인원감축으로 인하여 예전보다 잠시의 틈을 부릴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그동안 하도 많이 다녀서 그런지 그렇게 여행에 대한 미련도 크게 없을 때였다.


그러다 스트레스가 극한에 닿을 무렵 상사가 눈치를 챘는지 중간에 잠시 일주일을 푹 쉴 수 있는 오랜만의 긴 휴가가 생겼다. 집에서 그냥 쉴까 하다 그래도 이대로는 아쉬워 부산으로 2박 3일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쉬어도 무언가 해결이 되지 않은 것만 같았다. 해외로 여행을 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이미 코로나 터지기 직전, 베트남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언젠가부터 여행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한 번도 단순한 여행은 없었지만 일에 지쳐 그저 휴식을 취하는 여행보다는 예전의 시절처럼 새로운 삶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했다. 더불어 이미 몇 년 동안 누적된 신체적, 정신적 피로는 결국 우울증 전조증상 만큼의 심각한 번아웃으로 이어졌고 개인적인 집안일과 맞물려 결국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일단은 거두절미하고 갭이어를 같기로 했다. 그동안 하도 많이 이곳저곳 왔다 갔다 한 덕에 항공사 마일리지가 꽤나 많이 싸였는데, 유효기간이 다다를 때 즈음이라 겸사겸사 비즈니스 티켓을 끊고 그나마 예약이 가능했던 프랑스를 여행했다. 때로는 그냥 계획 없이 홀로 돌아다녔고, 어쩌다 보니 예상치 못한 시간을 벌게 되어 멀리 온 김에 가볼 때까지 가보자 하고 스페인까지 여행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다짐을 하나씩 쌓아갔고 엄청난 에너지를 얻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확실히 정해진 삶의 바운더리를 넘어 더 넓은 세상은 인생에서 정답은 없음이 분명해진다.

언젠가부터 정해진 삶에 익숙해지고 안주하려던 스스로를 다시 한번 깨어나게 했고, 나도 모르게 되뇌었던 남들이 얘기하는 그 한계를 정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미국으로 일하러 갔을 때처럼 도전에 있어 늦은 나이란 결코 없었다. 그때에도 서른 직전의 도전은 늦었다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는 여정은 그저 내 갈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되는 것임을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다녀온 후, 어제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살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고 시험하고 도전 중이다. 그것이 어쩌면 나를 지금까지도 여행에 대한 중독 아닌 중독으로 이끄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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