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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Sep 28. 2021

고운 정, 미운 정

파리일기 #3


가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그리고 난 정신없이 자다가 10시 수업을 놓쳤다. 그대로 침대에 1시까지 있다가 겨우 학교에 가서 오후 수업을 듣는데 뭔가 상쾌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익숙한 거리와 아는 건물을 드나들고 전에 가보았 던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집에 오는 길이 좋았다. 파리에서의 삶에 익숙해지는구나 생각했다.


어제는 친구와 밥을 먹으며 오는 길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는 논문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런 대화들을 나누는  즐거웠다. 내가 가장    있는 대화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선거에서 투표를 할 때 명확한 정치적 선호도를 기반으로 결정하기보다는 선거에 출마한 어떤 후보 또는 그 표방하는 가치들이 싫어서 온전히 그것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는 경향이 더 높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차선을 연구하는 것이 본질을  꿰뚫는 방법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다 문득 은희경 소설이 떠올랐다. 은희경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던 작가다. 2015년 여름 밤에 <새의 선물>이라는 책을 단숨에 읽었고,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아래 덧붙인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감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크게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이 말들은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많은 일들에 대한 해답이 되어주었다. 사람이 투표든 뭐든 하여간 어떤 선택을 할 때에 정확한 선호에 따라 결정을 하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좋은 것보다는 싫은 것을 정하는 게 더 쉽다는 것. 그렇게 모인 미운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내 취향의 지형도가 그려진다는 점. 참, 버릴 것이 하나 없구나 생각했다. 


가을방학을 바쁘게 보내느라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는데  정도면 괜찮게 보낸  싶다. 내내 뭔가 답답하더니  안에 말이 쌓여가는  싫었던 거였다. 부지런하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아서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지런히 읽지 않아서 그랬다. 다시 책을 집어들고 정리를 해야겠다. 내가 정리는 젬병이지만 말은 쌓여선 안된다는  안다. 쌓이기 전에 녹여내고 털어내고 정리해야지. 김영하 작가가 <알쓸신잡>에서 '언어수집가' 소개되는 것이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언어라는   필요할  싶다.  말고 언어. 쌓여가는 말들을 정리해서 언어체계를 만들고, 조금  세련되게 사유하고 너그럽게 말할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바쁜 가을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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