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중국어 원서를 읽으려고 마음먹고 중국 문학책을 펼쳐들었을 때 느낀 감정은 ‘좌절감’이었습니다. 중국어를 아무리 안 쓴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그동안 중국어를 배워온 시간이 얼마이며, 중국에서 유학까지 했는데, ‘내가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아직도 이렇게 많았다고?’라는 생각이 들며 애써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더라고요. 물론 장르에 따라 이해도가 다르기도 하고, 대부분의 책은 어떻게든 읽으며 대강의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를 놓고 봤을 때 모두 정확히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원서를 펼쳐보며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적이고도 불편한 경험이었어요. ‘그동안 도대체 뭘 공부한 거야’라는 생각이 들며 지금까지 공부한 과정이나 지식이 모두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 부끄럽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었기에 스스로의 이렇게 부족한 중국어 실력을 마주하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웠죠.
이 위기의 순간 제가 한 선택은 ‘부딪혀 보는 것’이었어요. 중국어를 더 잘 하고 싶다고 해서 꼭 원서를 읽을 필요는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한 번 찾아 나서보고 싶더라고요. 중국어 원서라는 미지의 산을 넘으며 깊고 폭넓은 '진짜' 공부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어렵고 막막하게 느껴지지만 나의 한계를 미리 재단하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온 마음을 다해 읽고, 또 읽으며 제대로 된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나 잘 모르겠어. 원서를 읽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해서 회피하지 말고, 정면돌파해 보자.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라고 지금 상황을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형편없어 보이는 저의 실력을 인정을 하고 나자, 극복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분명해지더라고요. 매일같이 포기하지 않고 중국어 원서 꾸준히 읽어보기 시작했고, 쓰고, 말해보고, 생각을 나누면서 원서를 더 깊고 다양하게 읽는 것에 집중하는 시간을 늘려나갔습니다.
그러자 중국어 실력이 한 단계 더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었고, 중국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중국인과 매일 소통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가끔 어려운 책을 만나면 힘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가득 담겨있는 새롭고 알고 싶었던 중국어 표현과 문장을 찾아내어 잔뜩 흡수하며,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는 어느 지점의 중국어 한계선을 뚫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원서 읽기에 대한 흥미가 점점 더 커졌습니다. 몰랐던 표현이나 문장구조가 책에 나오면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고, 책을 읽으며 자극을 받으며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습니다. 몰랐던 부분이나 궁금증을 찾아보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중국어 지식과 중국에 대한 상식이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물의 가치관이나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바라보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 생각을 더하며 내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어에 대한 자존심을 버리고 얻은 크나큰 수확이었습니다.
<어른을 위한 인생수업>이라는 책에 1955년 태국에서 있었던 실화가 나옵니다. 당시 사원 안에 석회 반죽으로 된 거대한 불상이 있었는데, 도시 보수로 사원을 옮기면서 이 불상도 함께 옮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일꾼들이 불상을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표면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주지승은 급하게 작업을 중단시켰습니다. 같은 날 밤, 이 불상을 다시 살펴보는 과정에서 주지승은 불상 표면의 틈 사이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석회 반죽 사이에서 찾아낸 특수 열쇠를 이용해 불상을 9등분을 했고, 석회 반죽을 모두 떼어낸 뒤 그 안에서 황금불상을 찾아냅니다. 태국의 3대 국보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황금 불상은 이렇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어 실력을 제대로 갖추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과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한 층 한 층 보호색을 덧바르듯, 중국어를 배운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저 ‘중국어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신경 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단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중국어에 대한 불필요한 허영심이나 자만심을 깨부수고, 안전지대를 벗어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힘이 필요하더라고요.
늘 재미있게 느껴지거나 쉽게 이해되는 중국어 콘텐츠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잘 이해되지 않는 한 줄의 문장, 잘 이해되지 않는 한 권의 책에 집중하며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의 중국어와 중국에 대한 이해를 꽉꽉 채워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동안 쓰지 않았던 중국어를 사용하며 언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가 있으니까요.
사실 중국에서 유학을 하면서도 전공서나 시험과 학업을 위해 봐야 수두룩했던 도서들을 제외하고는 중국어로 된 문학작품 한 권을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중국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리포트를 제출하거나 발표를 하고, 주관식으로 답안을 제출해야 하는 거의 모든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 큰 불편함을 겪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으로 학업을 수행하거나 생활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기에, 중국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중국어를 더 엄청나게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나 동기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불필요한 중국어 자만감만 쌓여가던 가운데, 한국에 돌아와 원서로 중국문학을 읽으며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저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동공이 지진 난 듯 이리저리 헤매며 당황했죠. 그렇게 저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다시금 진정한 중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느끼게 되었어요. 이때 중국어 자만심이나 허영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모르는 게 많다고?’라며 자존심 상해하거나 자책만 하며 길을 우회했더라면 원서를 읽으며 느꼈던 그 엄청난 희열과 재미를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문제의 인식이 곧 변화의 시작이며,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기회다.
벌어진 틈을 용감하게 파내다 보면
나의 상처 안에 숨겨진 커다란 힘을 발견할 것이다.
<어른을 위한 인생 수업>
책에서 주지승은 거대한 석회 불상의 벌어진 틈새를 파고들어 그 안에서 황금 불상이라도 만났지만, 사실 저는 원서를 계속해서 읽으면서도, 내가 하는 일이 삽질이 될까 봐, 뭔가 대단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봐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어 원서를 5년 넘게 꾸준히 읽어온 지금의 저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습니다. 중국어가 엄청나게 유창해지거나 인정을 받고 돈을 벌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닙니다. 원서 읽기의 가치와 효용성을 깊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이 아닌 그저 평범한 돌멩이 하나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대한 석회 반죽처럼 ‘허영심’이나 ‘자만심’이 스스로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반죽을 깨 부실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매우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의 약점을 파헤칠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그 이후의 공부에서는 아주 느리더라도 양질의 실력이 쌓여갈 수 있습니다.
한편, 괜한 ‘중국어 자만심’이라는 반죽을 어떻게 떼어낼 수 있을지, 즉, 어떤 방법으로 스스로의 실력을 직시하고, 약점을 극복하며, 중국어 실력을 탄탄하게 쌓아 올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과정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느낍니다.
주지승은 그저 반죽을 망치로 두드리기만 하면 되었겠지만, 내 안의 진짜 실력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렵게 느껴지는 공부들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나가고, 스스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분야를 찾아내고, 또 함께할 동료를 만드는 것 같은 일을 지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 자체가 내 안에 숨겨진 결과물을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으면서도 ‘내 중국어 실력은 아직 너무 부족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계속해서 채찍질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 여전히 배우고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 있음을 잊지 않고, 꾸준히 배우고 성장해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하루하루 더 발전하며 언젠가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짜릿한 맛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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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원서 읽기를 시도하고 싶으신 분들,
중국어 원서 읽기를 하고 있지만 자주 그만 되게 되는 분들에게
저의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번 포스팅은 마무리하겠습니다.
윤셰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