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처럼
[오사카로 가는 심야버스 한자리 있나요?]
[아, 오늘 밤 오사카행은 만석입니다]
[만석이요? 그럼 고베는요?]
[고베행은 조금 전에 출발했습니다]
[교토는요?]
[음... 교토, 교토는 마지막 한자리 남았습니다. 4열 좌석 한자리 남은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 몇 시 출발이죠?
[출발시간은 11시 10분, 탑승 정류장은 9번입니다]
그렇게 나는 그날 밤 교토행 심야버스에 몸을 실었다.
처음엔 오사카로 갈 생각이었다. (두고 온 짐은 다시 찾으러 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는 각오로) 급하게 중요한 짐만 챙겨 나오며 심야버스를 타고 오사카로 가 다음날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어떤 강렬한 힘에 의해 도쿄에서 떠밀려 나온 느낌이다.
(그날 밤 왜 갑작스레 집을 싸 집을 나오게 되었는지는 이 상황이 다 정리되고 나면 그때 다시)
나의 좌석은 2층 버스의 2층 제일 뒷자리 창가, 내 옆자리는 내 몸 두 배가 되는 유럽풍의 아저씨가 앉았다. 카레와 땀 냄새에 버스 엔진 소리가 뒤섞이자 숨이 막힐 것 같아 에어팟을 꺼내 재빨리 귀에 꽂았다. 눈을 감는다. 11시 20분에 도쿄역을 출발한 교토행 버스는 아침 7시 10분에 교토역에 도착한다. 멀미만 하지 않으면 된다. 버스가 출발하고 밤이 깊어지면 나도 모르는 어느 시점에서 분명 잠이 들 것이다.
버스는 1시 반쯤 휴게소에 멈춰 섰다. 버스에서 내리니 볼에 닿는 밤공기가 꽤 선선했다. 살짝 차갑지만 기분 좋은 맑은 공기, 긴장이 좀 풀렸는지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그 집에서 나오길 잘했다. 버스 출발시간에 맞춰 버스에 올라타려는데 안내문에 드림호라고 써진 글씨가 보인다. 드림호, 나는 지금 드림호를 타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웃음이 났다. 그래 웃자. 웃어야지.
옅게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버스 안이 환해졌고 곧이어 잠시 후 교토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창가 커튼을 살짝 걷으니 밖이 어느새 밝아있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잠이 들었었나 보다. 아아, 꿈같은 긴 밤이었다.
교토다. 버스에서 내리니 온몸에 힘이 풀렸다. 교토에 도착하면 그대로 역에 있는 이노다커피로 가 모닝커피를 하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하려 했는데 문을 연 곳이 한곳도 없었다. 살짝 차가운 아침 공기에 자꾸만 몸이 움츠려들자 주위를 살피다 지하로 내려갔다.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보니 어젯밤 세수만 대충 하고 머리를 틀어올리고 나온 모습이 어찌나 가관이던지, 그길로 근처 목욕탕을 검색했다. 다행히 교토역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온천이 있었다. 것도 8시 오픈. 얼마나 감사하던지. 곧바로 온천으로 향했다.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니 그제야 살 것 같다. 온천물이 온몸을 감싸주는 게 너무 포근하고 따뜻해 그 순간 내가 있을 곳이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마음이 평온해지는 게 발끝으로 전해져왔다.
아무리 여행을 좋아하고 즉흥적인 떠남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물론 지금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어느 도시를 가며 숙소를 정하지 않고 떠나온 건 처음인 것 같다. 온천욕을 하고 밥을 먹고 나니 그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이번 주말이 3일 연휴인데다 그전이 추석 연휴였다는 것을. 교토의 호텔은 연휴까지 방이 거의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가격이 너무 띈 몇몇 곳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교토에서 1시간 거리의 모든 곳을 다 뒤져 정상적인 가격으로 2박, 두 배로 뛴 가격으로 2박 총 4박을 예약을 했다. 그리고 다시 교토에 3박을 예약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운명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교토에 오게 되었다. 이왕 여기까지 흘러온 거, 그래 지금은 가을여행이라 생각하자. 지금은 지금을 즐기고, 그리도 머리를 비우고,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교토에 왔으니 카모가와에 인사는 전해야지. 여전히 평온한 카모가와를 내려다보며 교토의 바람이, 교토의 햇살이, 교토의 공기가, 내게도 좋은 기운을 가져다주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