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처럼
소제목으로는 [교토에서 떠나는 작은 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그럼 오늘은 1편으로 간략하게. 관광에 관한 좀 더 세세한 이야기는 2편에 다시 쓰는 걸로 하자.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 비와코[琵琶湖]의 도시 시가현에 왔다. 이틀을 히코네[彦根]에서 머물렀지만 밤늦게 도착해 하룻밤, 그리고 다음날 일찍 오미하치만[近江八幡]으로 이동했기에 엄밀히 말하면 히코네에서는 꼬박 하루를 머문 것이다.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히코네성으로 향했다. 타박타박 문 닫힌 역 근처의 상점가를 빠져나오니 히코네성으로 곧바로 이어졌다. 평온한 풍경에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딱딱하게 굳었던 온몸의 근육도 그제야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히코네성 천수각에서 바라보는 시야가 확 트인 비와코의 풍경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워 창가에 서서 한참을 머물렀다. 비와코에서 불어오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청량한 바람,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은 순간이었다.
겐큐엔[玄宮園]에서는 정원을 독차지하는 행운까지. 정원을 내려보며 차를 마시고 있으니 모든 걱정이 한숨에 사라지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도쿄를 떠나오던 밤, 너무 무서워 무작정 집을 나오긴 했지만 짐도 그대로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 남았고, 정신을 가다듬고 차분히 생각해 보면 결국 다시 도쿄로 돌아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게 맞다.
도쿄에 한 달 정도 있는 동안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다니던 병원에서 2년 만에 다시 정기 검진도 받았고 사실 가장 걱정스러웠던 결과도 좋아 한시름 놓았고,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일상을 향해가는 줄 알았는데... 머리를 식히며 설사 도쿄를 떠나더라도 (사실 도쿄가 싫어진 것이 아니라 룸쉐어의 문제니까) 다시 도쿄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게 맞는 일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할 곳을 찾아서. 그리고 교토에 살고 싶으면 교토로 오면 된다.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자 마음도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자.
교토에서 시가로 왔던 날은 해가 저물어 1시간 걸리는 거리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처럼 막막하게 느껴졌는데 날이 밝고 다시 보니 평온한 시골 풍경이 여행 기분을 내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휴일 풍경은 여유로운 시골길을 여행하는 느낌, 평일의 출퇴근 시간은 현실 속 만원 전철인 듯하다.
히코네에서 오미하치만으로 온 날 오전도 관광을 즐겼다. 이날도 아침을 서둘렀더니 여유로웠다. 배를 타고 한 바퀴 도는 하치만노보리가 생각보다 괜찮아 여행 기분은 충만해지고.
오미하치만에서 머무는 호텔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흐린 날씨가 한몫하긴 했지만 그동안의 피로가 한 번에 멀려 와 여기서부터는 관광은 접어두고 온전한 호캉스가 되었다. 어쩜 지금의 나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휴식인지도. 마치 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서 뒹굴뒹굴하는 것처럼 아주 오랜만에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니 그대서야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모처럼 만에 기분 좋은 늦잠을 만끽하고 점심을 먹으로 밖으로 나왔다. 호텔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꽤 맛있어 보이는 함바구 집을 발견하고 보니 현금만 가능, 런치 세트는 1980엔인데 내가 가진 현금은 1691엔. 깜빡 잊고 있었지만 일본 소도시에서는 현금은 필수다.
ATM을 찾아 다시 동네 한 바퀴. 역으로 돌아가면 편의점이 있지만 이상하게 반대 방향으로 걷고 싶은 충동이 들어 또 한참을 걸었다. 걷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를 십여 분 정도 걷다 보니 쇼핑몰이 나왔고 다행히 ATM도 있어 현금을 찾아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런치 세트는 ATM을 찾아 동네 한 바퀴 돈 보람이 충분히 있었다. 후리가케같은 드라이쇼유(간장)를 함바구에 뿌려 먹으라고 했는데 그 드라이쇼유가 맛이 꽤 괜찮았다. 나중에 한 번 따라 만들어보고 싶은 만큼.
참, 시가현에 와 식당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데 밥이 다르다. 가성비 좋은 식당도 밥에서 윤기가 난다. 도쿄에서 가성비 좋은 식당에서의 윤기 없는 밥에 위화감을 느꼈던 게 왜 그랬는지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밥맛이 틀렸다. 그래서 두둑한 양의 밥 한 공기를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아주 불안정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가에서 멋진 풍경을 보며 맛있는 밥을 먹으며 티브를 보며 푹 잘 쉬어간다. 다시 에너지를 충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