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처럼
조금 늦은 아침, 빨래를 건조기에 돌리는 사이 잠시 산책을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곧바로 여행이 되어버리는 곳. 하루가 다르게 선명해져가는 산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발걸음은 텐류지를 향했다.
단풍 기간 오픈 시간은 7시 반이라 9시를 넘기자 텐류지 입구는 이미 발 빠른 여행객들로 가득 찼다. 가을을 입은 텐류지의 정원 산책은 오픈 시간으로 정해두고, 늦은 아침 산책은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갈대와 단풍이 어우러진 입구에서 옆에서 들려오는 갈대를 좋아하는다는 어떤 이의 말에 옅게 흔들리는 갈대에 나로 모르게 카메라를 가져다 댔다. 입구 쪽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림 같은 풍경이 정원을 들어서면 펼쳐지지만, 그건 좀 더 깊어진 가을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고 옆으로 나있는 좁다란 골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람이 좀 더 거칠어져야 가을 색이 짙어지겠지만, 적당히 따뜻한 기온이 산책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 빨래를 건조기에 돌리는 동안에 잠시 나온 1시간짜리 산책이라는 것에 묘한 우쭐함을 느끼며 타박타박.
주렁주렁 널린 감나무에게 인사를 건네며 골목길의 작은 풍경도 기억하려 몇 번이고 눈을 맞추었다.
[팡또에스프레소또아라시야마테이엔] 카페에서의 근사한 모닝메뉴가 아니라도 언제든 모닝빵을 가볍게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짝 어깨가 들썩인다.
인력거가 있는 마을 풍경,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비현실적인 풍경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골목에서 만나는 인력거의 풍경보다 2차선 도로에 인력거 자동차 버스 자전거 가끔 도로를 달리는 사람까지 더해진 풍경이 어쩜 더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리고 또 하나의 비현실적인 풍경과 만난다.
영상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배를 따라 달리는 옆의 자그마한 물체가 바로 이것.
리카인형의 모형배인데 주말에 처음 봤던 모형배의 주인을 우연히 발견했다. 자상한 미소의 할아버지가 원격 조정을 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취미생활이시라며 이것저것 설명해 주셨다. 곁에 서서 감탄을 하고 있는 10여 분 사이 할아버지를 찾은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살짝 엿들으니 1년 전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왔다는 사람, 몇 번이고 만나려고 애썼다는 사람, 프로용 카메라 렌즈를 여러 개나 어깨에 두르고는 포즈를 취해달라는 사람 등 아마도 이곳에서는 꽤 유명한 분 같아 보였다. 영어를 잘 하신다고 대단하시다고 하니 실은 프랑스어를 더 잘 하신다면 살짝 시범을 보여주시며 멋쩍게 웃으셨다. 그 미소가 얼마나 근사하던지. 산책으로 자주 나오신다는 다음에 뵈면 또 말을 걸어봐야겠다.
집으로 돌아가 건조가 완료된 빨래를 정리한 다음 산책 기분을 이어 이번엔 헤이안진구로 향했다. 아, 아라시야마에서 헤이안진구로 가는 길은 아주 현실적이다. (물론 쉐어하우스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랬지만) 멋진 풍경들과 상반되는 현실적인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미루고.
버스를 타고 헤이안진구 근처에 내려 히가시야마역을 지나 네네노미치까지. 그리고 다시 마주한 인력거가 있는 풍경, 아름다운 풍경까지는 좋았지만, 비현실적인 산책의 끝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홈센터에 들러 전기담요를 사고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겨울 코트를 찾아 20분을 걸어 집까지 가서 히트텍 2개에 레깅스 2개를 껴입고 자는 매우 현실적인 밤이었다. (전기담요를 사기 전까지 히터를 켜고 잤더니 얼굴이 얼마나 붓던지 그래도 새로 산 전기담요 덕분에 처음으로 푹 잘 잔 밤이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