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처럼
아침에 눈을 떠 창문을 여니 산 너머로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이 풍경이 내 방 창문 풍경이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는) 비 내리는 아침, 몽글몽글한 안개를 보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가를 향하는 동안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져 작은 우산 안으로 빗물이 흘러들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가로 향했다. 비가 와도, 일찍 나와도, 어떻게도 긴 줄을 피할 수 없는 % 커피를 지나 타박타박 또 타박타박. (이곳에 살아도 좀처럼 마실 수 없는 % 커피)
그새 또 색이 짙어졌다. 같은 자리에서 셔터를 눌러도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맑은 날의 느낌이 다르고 비 내리는 날의 느낌이 다르다.
며칠 전 교토의 단풍 랭킹을 봤을 때 1위가 도후쿠지[東福寺], 2위가 아라시야마[嵐山]였는데, 나는 오늘 아침으로 내 안의 1위는 아라시야마로 정했다. 사실 햇살 쨍한 날의 단풍이 최고라 생각했다. 쨍한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빛날 때가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오늘 아침의 아라시야마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단풍나무 켜켜이 몽롱하게 피어오르는 안개, 그 안개가 빗소리를 타고 유유히 흘러내린다. 셔터를 아무리 눌러도 담아낼 수 없는 몽환적인 풍경,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한순간의 풍경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을 것만큼.
그 아름다운 풍경 속 진짜 주인공은 오리, 배가 멈춰 선 강가에 오리들이 얼마나 신나게 헤엄을 치던지, 오리에 시선을 맞추고 함께한 시간도 가을 기억의 일부가 되어주었다.
손님을 싣지 않은 배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어디론가 향하는 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풍경이 또 묘하게 달라진다. 얼마 동안 이 풍경에 빠져 허우적거린 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운동화가 다 젖어버렸다. 가만히 보니 이곳에서 가장 필요한 건 장화와 비옷 아닌가. 예쁜 걸로 살 거다. 그리고 비 내리는 날의 아라시야마를 온몸으로 즐길 거다.
가을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가고 나의 글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고. 안되겠다. 단풍 사진만은 계절을 타야 하니까 비 내리는 날에 이어 전망대에서 찍은 햇살 쨍한 날의 풍경도 함께 남겨둬야겠다. 아라시야마 % 커피를 따라 안쪽으로 10분 정도 쭉 걸어간 다음 위쪽으로 나있는 조금 가파르고 좁다란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10여 분 정도) 시야가 확 트이는 멋진 전망대가 나온다. 내가 정한 아침 산책 A 코스인데 전망대를 둘러 치쿠린으로 나오는 코스로 풍경이 멋지고 살짝 등산 느낌도 나 산책 코스로 꽤 괜찮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도롯코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도 만날 수 있는데, 열차의 기적 소리까지 풍경의 일부가 되는 더없이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는.
햇살 쨍했던 며칠 전 텐류지 앞 풍경.
비 내리던 오늘 아침의 풍경. 시간이 소리 없이 흘러가고 가을 풍경도 조금씩 달라져간다. 누군가 말한다.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단풍 시즌이라고. 그러다 가을이 다 가버린다고. 그래, 내일은 교토 단풍 랭킹 1위라는 도후쿠지[東福寺]로 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