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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jeong Mar 20. 2023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친구들과 서로를 스피노자라고 부를 때가 있다. 웬 스피노자.. 그건 운명을 믿는다는 얘기를 할 때의 우리만의 밈이나..뭐 관용어 같은 거였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나 배웠던 철학자 스피노자. 그는 운명을 믿는 철학자였다. 그는 우리 모두 정해진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가고 있으며, 모든 것은 다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자였다. 우리가 처음 믿었던 운명이란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와 같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그게 내 합리화의 메인 재료가 될 줄은 몰랐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남몰래 안도하며 계속 수동적으로 굴었다. 나의 정해진 운명과 결말만을 궁금해했다. 해내야 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는 그 일이 다 지난 후의 나를 생각했다. 지금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나는 결국 이 난관을 헤쳐갔을까? 아님 좌절했을까? 하며 자꾸만 미래의 나를 상상했다. 그러다 보면 자꾸만 허무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야 하는 주인인 내가,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결말을 기다렸다. 그 결말에는 처음부터 내가 전혀 개입할 수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가장 마음 속 깊은 곳, 나도 자주 잊어버리고 마는 그 심연에는 항상 이 말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잘 안될 테지만 말이야'




이렇게 수동적이고 겁 많은 사람을, 관심도 없던 축구 경기가 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축구에 큰 관심이 없다. 축구에서 아는 것이라고는 골밖에 없는 수준이다. 작년 12월 포르투갈과의 월드컵 경기가 있던 날, 만나기로 했던 친구 중 한 명이 월드컵에 빠져있다고 했다. 내 자취방에는 TV도 없고, 혼자 핸드폰으로 월드컵 중계를 보고 있을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기에 그때 나는 월드컵과는 좀 먼 세상에 있었다. 그날도 친구들이랑 누워서 빔 프로젝터로 축구를 틀어놓고는, 이러다 전반전도 지나지 않아 다들 잠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날 우리는 친구의 원룸을 날려버릴 만큼 소리를 지르며 축구를 시청했다.


그날의 결과는 멍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던 경기. 90분이 지나고 모두의 예상대로 끝나는 줄로만 알았던 경기. 하지만 그날의 선수들은 저마다 운명의 멱살을 잡고 싸우고 내치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고야 말았다. 그런 그들이 붙잡고 있던 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그 말이 정말 내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어서 아플 만큼 부끄럽게 했다.




나는 지금 도전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잠시 멈추기로 했고, 이제는 다시 나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 나아감을 준비하면서 나도 모르게 또 운명을 기대했다. 엄청난 자기방어였다. 터무니없는 꿈을 꾸면 안 되니까, 너무 다치면 안 되니까, 이미 내 운명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무의식적인 인정을 하고, 안전하고 싶었다. 편하고 싶었다. 그게 드디어 현실을 깨우친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생각한 적도 있는 것 같다. 부끄러웠다. 만약 그날 선수들이 나 같은 자세로 임했다면 그런 결과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운명 대신 노력과 진심을 믿을 때, 나는 내 인생을 실체도 없는 존재에게 맡기고는 천하태평이었다.


그날의 충격은 관념적으로만 남지 않고 실제로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이제 운명에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한다. 이전과 같이 미래의 내게 눈짓을 보내고 싶은 습관이 고개를 들 때면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린다. 미래는 지금 내가 뭘 하는가에 달려있을 뿐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운명이 있다고 해도 없다고 믿을 것이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꿈꾸고 부숴가면서 살아가는 게 더 꽉 차고 재밌는 삶이 될 것 같다.




여전히 가끔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싶어질 때, 나는 '이게 다 스피노자 때문이야'를 중얼거린다. 스피노자에겐 죄송하지만 내가 구려보일 때는 남 탓을 하라고 장항준 감독님이 그랬다. 그렇게 괜히 스피노자의 탓을 하고, 아니!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이라고 한번 외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의 할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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