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J의 이미지를 그려보자면 노란색 스웨터가 먼저 떠오른다. 특별히 노란색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름에는 노란 티셔츠를, 날이 추워지자 목을 감싸는 터틀넥 스웨터를 자주 입었다. 나는 그녀와 노란색이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종종거리며 성당 마당을 돌아다닐 때는 알에서 막 깨어난 병아리 같았고 미사포를 쓴 채 다소곳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노란 옷을 입은 성녀처럼 보였다. 나는 MJ 와 같은 옷을 맞춰 입고 거리를 걷는 상상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면 상상의 범위는 넓고 다양해지는 법인데 노란 스웨터를 통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암튼 MJ 를 향한 고백은 성공이 목적이 아니라 내상을 최소화 한 채 거절당하는 게 관건이었다.
독협의 3/4차 실습은 16미리 필름 작업이었다. 3차 실습은 하루 일정의 카메라와 필름 조작법이라 큰 의미는 없고 결국 4차 실습이 독협 워크샾의 메인이자 하이라이트였다. 기획의 시작 단계인 시나리오 선정에서 우리는 각자 써온 15분 내외의 시나리오를 놓고 투표에 부쳤다. 현실적인 예산문제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우리만의 작품을 남기는 거라 다들 진지하게 임했다. 나는 ‘커플 스웨터’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제출했고 이는 당연히 MJ를 생각하며 쓴 것이었다. 자체 토론과 투표를 거친 끝에 커플 스웨터는 최종 실습 시나리오로 낙점되었다. 독립영화의 취지에 맞는 플롯과 적은 예산으로도 촬영이 가능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나는 원작자로서 시나리오의 수정 보완 작업을 진행했고 그 사이 다른 멤버들은 캐스팅과 장소 헌팅에 나섰다.
마침내 고백의 D-Day. 청년 미사가 끝난 뒤 교육관의 외진 방으로 MJ 를 조용히 불렀다.
“ 저기 실은 제가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 네? 아.... ”
그녀도 어느 정도 상황을 감지한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이 조그만 성당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라는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 외에도 그녀를 마음에 두는 사람은 더 있었고 그 중 내가 몇 순위인지는 알 수 없었다. MJ 는 나보다 6살 어렸지만 다른 자매들처럼 말을 놓지 못하고 늘 존댓말을 썼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우리 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각자 눈길을 피했다.
“ 감사해요. 좋아해 주셔서. ”
“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죄송합니다.”
세상에나, 이렇게 형편없는 고백을 하다니. 좋아한다 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 같다가 뭐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내가 먼저 자리를 떴고 고백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런 바보 같은 고백 아닌 고백을 해야만 했던 현실이 슬퍼 눈물이 흐르지도 않았고 해야 할 일을 해치웠다는 후련함이 들지도 않았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그녀를 둘러쌌던 지난 시간들을 반복 재생하며 밤을 지새웠다. 성당에 말이 돌지 않는 걸로 봐서 MJ 는 그날 일을 누군가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에 대한 배려일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신경을 안 쓴 걸 수도 있었다.
그날 이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무기력해졌다. 독협도 나가기 싫고 전부 관두고 싶었다. 어차피 영화감독을 간절히 꿈꾼 것도 아니었고 아니, 전혀 꿈꾸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당장은 먹고 자고 싸는 본능적 행위 외에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팀원들에게 취업 준비로 인해 더 이상 제작에 참여할 수 없다는 거짓말을 한 뒤 내 시나리오는 폐기해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끝까지 커플 스웨터를 찍겠다고 고집했다.
“ 형이 없어도 상관없어요. 이미 시나리오는 완성된 상태고 지금 다른 걸로 바꾸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저희는 커플 스웨터가 맘에 들거든요. 끝까지 같이 할 수 없어 아쉽긴 하지만.... 혹시 부탁할 건 없어요? 어떻게 찍어라, 여기를 강조해라 등등 이런 것들. ”
중간에 도망치는 주제에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알아서 마음대로 찍으라 했고 소소한 한 가지만 부탁했다.
“ 별거 아니긴 한데 여주인공 이름 이니셜을 MJ 로 해주지 않을래? 예를 들어 민정, 명주, 음... 또 뭐가 있을까. 암튼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그냥 MJ 면 돼 ”
“ 네??? MJ 가 혹시 형 첫사랑이라도 되요? 그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알겠어요. 나중에 저희 상영회 때 연락드릴 테니 꼭 오세요. ”
나는 성탄미사가 끝난 뒤 성당과 성가대에 발을 끊었다. 그리고 얼마 뒤 MJ 가 성당을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 사정으로 갑자기 청년활동을 중단하는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MJ 는 성당에서 증발해버렸다. 한 달 뒤 독협 워크샾 커플 스웨터 상영회에 초대를 받았다. 관객은 다 합쳐봐야 스무 명 남짓으로 대부분 지인들로 보였다. 약속대로 영화 속 여주인공 이니셜은 MJ 가 맞지만 실제 그녀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결과물 역시 좋은 편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시나리오를 크게 수정하진 않았지만 촬영과 편집 모두 어색하고 튀는 구석이 느껴졌다. 영화 속 남녀는 노란색 커플 스웨터를 맞춰 입었지만 상상했던 설레임의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동료들에게 수고했고 잘 봤다는 형식적인 말을 건넨 다음 뒤풀이도 가지 않고 집으로 왔다. 내 생애 앞으로 영화를 찍을 일이 다시 있을까. 하지만 영화와 함께 뒹굴었던 독협의 경험 때문인지 훗날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됐으니 그 시간이 무용하지만은 않았다. 한편 MJ 의 존재는 성당에서 조용히 지워졌기 때문에 나에게 그녀는 아무런 훼손 없이 스물셋의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영화 커플 스웨터 역시 그대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