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년 만에 다시 읽다
안 읽어도 할 말 많은 책이다.
신문 칼럼 몇 개만 읽어도, SNS 댓글만 열심히 눈팅으로 주워 읽어도 아는 체할 게 얼마나 많은가.
식민지 상황에서 반일은 당연하고, 친일은 욕먹어 마땅하고, 봉건지주는 몰아내야 되고, 미완의 토지개혁은 아쉬울 따름이다.
안 읽어도 떠벌떠벌 아는 체 술자리 토크 할 수 있는 내용들을 꾸역꾸역 읽었다.
왜?
아는 척하지 말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다.
제대로 알아야 덜 부끄러울 것 같고 덜 미안할 것 같아서다,
먼저, 나는 이 책을 36년 전쯤에 이미 한 번 읽었었다.
교양과목 한국사 리포트를 쓰기 위해, 오로지 A학점을 받기 위해 '토지개혁 부분'만 골라 골라 읽었다.
'해전사 읽고 머리가 홱 돌아삐맀다'는 비장미 넘치는 감동 같은 건 물론 없었다. 고작 19살에 고작 대학 1학년에 고작 학점 잘 받을 고민만 있을 때였다.
합계 1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고 두 번에 걸친 토론을 하며 내가 새로이 배운 바는 다음과 같다. 내용이 방대하니 자칫 글이 방만해질 염려가 있어 파트별로 간단 정리한다.
1. 친일파
아수라장이다. 일제 36년의 세월이 긴 세월이니 다양한 스펙트럼의 친일이 있었다.
살기 위해 부일도 하고, 더 잘살기 위해 친일도 하고, 더욱더 잘살기 위해 매국도 한 인물군상들을 보니 한숨이 난다.
구석구석 요소요소 이렇게 썩어 문드러지게 많았나?
솔직히 최남선과 주요한은 조금 충격인데, 왜냐면 이들의 친일 행각을 한 번도 제대로 배은 적이 없었다.
익히 이름난 학자며 문인이며 이른바 그 당시 사회지도층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친일명단 사전에 올라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권력과 금력에 힘입어 유학을 가고 관료가 되고 사학재단을 만들고 적산을 불하받고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해방공간의 한국민주당과 지금의 보수정당이 오버랩된다.
2. 토지개혁
북한이 사회주의국가로 진입하면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서둘러 끝낸 마당에, 남한은 토지개혁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타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미적미적 3년여의 시간을 끌면서 진을 뺀다.
왜? 토지개혁을 추진해야 할 입법의원들의 대다수가 지주들이다.
이들이 신인동체가 아니고서야 제 땅을 무상으로 남에게 순순히 넘길리는 없다. 해방 이후 입법의원을 비롯한 관료들의 구성이 일제강점기 관료체계와 인적구성을 그대로 답습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결국 유상매입 유상분배, 즉 정부가 중간에 나서서 돈 주고 사서 돈 받고 파는 토지매매를 하게 된다.
땅 값의 3배를 쳐서 매입하여 지주들의 배를 불리고, 이렇게 배가 부른 지주들은 이후 산업자본가로 성장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한편 땅을 매입한 농민들은 땅값 상환을 제때 못하여 결국 땅을 되팔아 도로 소작농이 되거나 도시 노동자가 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토지개혁의 도식적인 내용이다.
36년여 전에 이렇게 도식적인 내용의 리포트를 제출하여 A학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새로이 알게 된 것이 있으니 해전사 2에 실린 장상환 교수의 논문 덕분이다.
장상환 교수의 글은 당시 충남지역 면단위에서 행해진 토지개혁의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해방공간에서 지주들은 언제 죽을지 또는 땅을 뺏길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고.
이에 서둘러 싼 값에 땅을 파느라 손해를 감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당시 땅을 매입한 소작농 및 소자작농들은 시세보다 싸게 땅을 구입해서 만족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정부의 토지개혁정책으로 유상매입을 당한 경우 지주들이 땅값으로 돈을 벌기는커녕 3년 상환으로 나뉘어 들어오는 푼돈은 생활비로 충당되고, 하여 당시 그 지역 지주들의 대부분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개별적인 사례와 특수한 경우를 무시하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 옳고 그름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의 시각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비판을 위한 비판에 매몰되는 것 등등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 이후 시급한 문제가 토지개혁이었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풀리지 않는 숙제 중 하나는 '부동산과 집값'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어떤 법을 만들어도 법망을 피해 가는 눈 밝은 꾼들이 있다. 게다가 입법부 의원들 중에 부동산 가격 안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싶다.
3. 순수문학
순수문학은 순수한가?
흔히 황색 저널리즘이라 불리는 퇴폐적이고 자극적인 매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참여문학이라 불리기도 하는 현실정치와 맥을 닿고 있는 문화나 미디어는 마치 정치적 후견인의 취급을 받으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 순수문학은 순수 그 자체인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을 얼버무리곤 했었는데, 해전사 문학 파트를 읽으면서 생각이 정리되었다.
순수문학은 순수하지 않다고.
문학은 결국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반영할 수밖에 없다. 현실과 벽을 쌓고 애써 무시하고 천상의 순수한 아름다움만 표현하는 것이 과연 순수한 것인가?
어쩌면 '순수'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의 생각을 마비시키는 것은 아닌가?
해방공간에서의 '순수'는 '황색 저널리즘' 만큼이나 사악한 것임에도 순수라는 말의 어이없는 순수함 때문에 비판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흔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고 한다. 해방공간 문학의 영역에서 순수가 판을 쳤다면 어쩌면 당시에는 '순수'가 '악화'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