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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 Mar 18. 2022

(1) 8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서울 라이프

30대 프로이직러의 커리어 이야기




브런치에 마지막 글을 남긴 게 언 1년이 넘었네요.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는 게 오늘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생활치료센터 창밖으로 저 멀리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코로나 확진 후 자가격리 해제를 몇 시간 앞둔 지금이야말로 제10여 년의 커리어 사이클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던 2년의 종지부를 찍는 시점이기 때문이죠.




직접적으로 코로나가 나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게 2020년 3월 중순 생일 무렵,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호치민 강가의 레스토랑에서 지인들끼리 저녁을 먹고 난 그다음 주. 저는 분명 확진자의 접촉자의 접촉자쯤 되는 F4 정도였는데도 회사에서는 격리를 해야 한다고 난리 치던 그때부터였습니다. 연쇄적으로 격리> 전사 재택의 연속에 심지어 외국인 노동비자 제한 조치로 갓 이직한 회사에서 3개월 안에 발급받아야 하는 내 비자 문제부터 글로벌 고객사들의 연이은 거래 취소까지.


브런치에 남긴 초반 글들을 보면 내가 무슨 심정으로 6년간 이어오던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지금 보면 쌓인 감정들을 쏟아 내듯 글을 써 내려갔는데 2년이 지난 오늘이야 말로 코로나와의 실타래를 이제 다 풀 수 있는 날이구나 싶습니다. 이제 코로나 확진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도, 애써 헬스장을 피할 이유도 없어졌으니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하다고 할까요.


커리어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데이터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다시 카테고리를 넓게 '커리어'로 잡아봅니다. '프로이직러'라는 수식어와 함께:) 프로가 어울릴지는 모르겠고 동년배들의 이직 횟수를 비교해 봐도 또 나라를 계속 바꿨던 스테이지를 고려해봤을 때 적어도 이색적인 스토리를 가지고는 있습니다. 잠시 온라인에 제 흔적들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2년 동안의 스토리도 제 기준에선 화려하진 않지만 고군분투했던 시기였기에 썰을 풀어 봅니다.


현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2년 전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랬잖아요. 나만의 기술을 가진, 콘텐츠를 가진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기술이 데이터였으면 좋겠다고. 데이터 분석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이리저리 두드리며 파고들다가 새로운 경험도 해보고 부딪히던 2년을 보내고 1월부터 서울에서 데이터와 관련된 회사에 발을 들여놨으니 일단 한국 들어올 때의 목표에 절반은 다다른 것 같아요. 물론 현실과 이상의 갭, 그리고 개인적인 스킬 셋 역량적 한계를 계속해서 느끼고 있습니다만 30대 후반에 접어든 2022년, 커리어 체인지를 위한 물결에는 올라탄 건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이번 글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이 아니라 되돌아보면 스펙터클했던 저의 2021년이랍니다. 6개월짜리 인공지능 개발자 과정을 마친 2020년 12월, 저는 다시 부모님이 계신 본가로 내려가 무려 15년 만에 60대 부모님과 1년간의 동거를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길어봐야 일주일? 같이 보냈던 가끔 봐야 좋은 사이였던 부모님과의 1년간의 생활부터가 챌린지였지만 코로나 청정구역인 시골 한가운데 전원주택에서 나의 미래는 어찌 흘러갈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근본적인 물음표를 계속 던지던 시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이런 시간 1년쯤은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속세에서 벗어나 를 들여다보는 시간.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돈 만원이라도 내 이름 걸고 스스로 벌어본 적 있는가?


내 콘텐츠를 찾고 싶다고 시작한 여정인데 정작 경제적 수익으로 연결 짓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터. 일단은 '회사'라는 조직에 기대는 건 제외하고도 내가 가진 캐파로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를 하나씩 연결해보던 1년이었습니다. 비록 큰 수익을 내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그동안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다는 자신감을 찾는 여정이었죠. 반고정, 반프리 생활을 1년간 했다고나 할까.


 HR 컨설팅이라는 이름하에 많은 분들에게 회사 타이틀 말고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지는 게 중요한 시대가 될 거라라고 말을 하고 다녔는데 내가 뱉은 말을 실천하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네요. 아마 독기를 좀 더 품고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고 달려들었으면 회사로 다시 돌아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는 부모님과 오랜만에 보내는 시간, 반려견 초코와 함께 농촌 들녘을 산책하는 시간들이 더 소중했기에 소소하게 벌면서 저를 시험해본 일련의 두드림들 이럴 수도 있구나 정도로만 봐주세요.


미래 채움 SW 강사로 활동 : 4월부터 12월까지 SW 강사로 경북지역 초중고 아이들을 만나고 블록 코딩의 세계로!  IT 소외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SW 교육을 실시하는 프로그램인데요, 강사 교육을 받고 소정의 월급을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덕분에 내가 나고자란 경북 지역의 학생들이 수도권에 비해 얼마나 더 열악한 IT 인프라 교육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영한/한영 번역 감수 : 꽤 쏠쏠한 수입원이었습니다. 나름 그래도 영어로 몇 년 일해왔다고 영어 감은 좀 살아있었던 상태였는데요, 일반 번역이 아닌 번역 데이터 감수 작업이었어요. 모든 활동을 데이터와 연관 짓고 싶었기 때문에 언어 말뭉치를 구축하는 회사의 기계번역 감수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음. 특허 번역도 있었고, 당뇨병 논문 관련 등등 전문 영역의 기계번역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검수작업을 하면서 잠시 멈춰있던 영어 감을 살리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속도를 높이면 시간당 3만 원까지도 가능했었던...)


데이터 라벨링 : 크라우드 소싱 방식으로 단기 알바를 찾는 분들이라면 가장 손쉽게 접근하는 작업이기도 했는데요, 개발자 과정 교육을 들을 때 머신러닝 프로젝트 구현 시 가장 짜증 났던 작업이 이미지 파일에 원하는 영역 따고 라벨링 하는 작업이기도 했죠! 왜 이걸 돈 주고 사람들에게 뿌리나 심정적으로 이해가 너무나 되던 건이었는데요, 자율주행 시스템 구축을 위한 자동차 번호판 따고 숫자 적는 그런 단순작업 조금 하다가 이건 눈이 아파서 못하겠다 싶어 점점 단가 높은걸 찾다 보니 '언어'와 관련된 작업들! 단기성 프로젝트들이었지만 그래도 교육을 받은 적 있고, 라벨링 몇 번 해봤다고 건수들이 잘 이어져서 나름 쏠쏠! 단순작업일 수도 있지만 저는 데이터와 관련된 업무들 뒷단에는 이런 기초적인 전처리 작업이 80프로 이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 경험이다 생각하기로.


취업강사 활동 : 프로이직러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던 프리랜서 활동이죠:) 특히 취업 관련 전문인력들이 지방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취업강의를 위해 KTX 타고 서울에서 강사들이 오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요, 고등학교와 대학교 진로특강, 자기소개서&이력서 첨삭 강의를 하반기에 좀 뛰었습니다! 바뀌는 세상 이야기, 학벌에 목숨 걸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으나 아직 창창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우리 청춘들이 이미 풀이 죽어서 자신의 한계를 지어 놓는 듯한 느낌을 너무 많이 받아서 더 기가 빨리는 느낌이라 몇 건 정도만 진행하고 스탑 했습니다.


디지털 배움터 캠프 강사 : 요건 11~12월 2달 정도 주말 토/일 하루 8시간씩 풀로 당겨서 경북 지역의 초등학생들 대상으로 인공지능 캠프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이미 또래 친구들의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있지만 싱글인 저로선 요즘 초등학생들과의 대화를 많이 해 볼 기회가 없었기에 2010년대 태어난 아이들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문화충격받는 시간들! 초딩들의 워너비 애창곡은 이무진의 신호등이었고, 요즘 아이들은 웹툰도 짤툰이라는 유튜브로 영상으로 소화하는구나를 알게 되었지요!


구글 애드센스로 돈 벌기 : 이걸 성공했다면(목표는 하루 100불 벌기) 전... 지금쯤 노트북 들고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호캉스 하며 아님 제주도에 내려가서 글만 쓰고 있었을 텐데. 혹은 유럽으로 튀어서 한 달 살기 하면서 글빨 날릴 테지만 결론은 쉽지 않은 테마였음. But 포기하지 않고 6개월 정도 글을 꾸준히 쓰면서 갑자기 터진 키워드에 애드센스로 한 달에 65만 원 정도까지 달러를 벌어봤으니 적어도 돈을 벌 수 있는 파이프라인임은 확인했습니다. 지금은 아주 가~끔 들어가서 글 쓰다보니 두달에 한번씩은 정산받는 정도?


이밖에도 자잘하게 시도하면서 푼돈들을 벌어본 소스들이 있지만 민망한 수준이라 생략합니다. 유튜브도 해볼까 끄적이다가 패스, 해외소싱도 해볼까 공부해 보다가 패스, 주식은 소소한 수준으로 계속하고 있지만 퍼런불만 보여서 스트레스받는 중임.




1년을 되돌아보며 얻은 것은, 지금은 정말 두드리면 기회가 열리는 세상이구나, 바로바로 배워서 써먹을 수 있는 능동적인 사람만이 살아남겠구나를 부딪히며 깨달았다는 것. 때문에 마음은 좀 더 단단해지고, 내가 배우고 써먹고 싶은 기술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재미가 생겼으니 누가 나를 보고 뭐라 한들 let it go~가 좀 수월해졌다고나 할까요. 커리어는 이제 좀 거창하고 무거운 단어로 느껴지고요. 독립적인 캐파를 가진 개개인들의 역량을 모아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회사여야만 이 험난한 시대에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를 핑계 삼아 은둔의 21년을 보내고, 다시는 안 오려고(?) 했던 서울에서 햇수로는 8년 만에 직장생활을 재개한 2022년의 이야기도 자주 끄적여보겠습니다. 몸속의 바이러스가 다 배출되어 가는 이 시점에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글로 해보고 싶어서 길게 썰을 풀었습니다:) 이후의 글들은 어려운 공부 하겠다며 굳은 뇌를 살리려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코로나야 잘 가거라~~ 다시는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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