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구멍에 관한 이야기
토요일 오후, 외출에서 돌아와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표시되어 있다. 이런 경우에 상대는 대부분 메시지를 남긴다, 그럼 그렇지.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 그의 용건에 대해 잠깐 짐작해 본다.
왜 전화를 한 걸까, 만나자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너무 진지하지, 자주 통화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냥 전화했어, 그런 전개도 어색하다, 역시 짐작은 무리라 생각하며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노끈에 묶여있는 책을 찍은 사진 아래 메모가 적혀있다.
‘나쓰메 소세키랑 박완서 책 소장하려고 놔뒀는데 좋아하시면 드릴까 하고요, ㅎㅎ.’
‘짐싸노? 나쓰메 소세키만!’ 나는 답장을 보낸다.
‘아직이요. 버릴꺼 버리고 집 결정되면 설 이후에 갈려고요.’ 라며 그가 곧이어 답한다.
우리는 일정 기간의 헤어짐이 있을 것이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날 것이다.
책을 받으러 나가며 작은 화분을 챙긴다. 어미 나무의 겨드랑에 달리 작은 가지를 떼어내 물꽂이 후 화분에 심은 것이다. 움벨라타 고무나무(Ficus umbellata). 잎과 뿌리가 쉬 상하지 않고, 목이 무척 마를 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잎이 시들 하지만 물을 주면 곧 싱싱해지며 자신의 컨디션을 확실히 알려주는 나무다. 서 있던 자리에서 화분을 조금 옮겨 주면 나름 적응해 보겠다는 표시로 잎을 모두 떨군다. 하트 모양 잎을 한꺼번에 바닥에 토해 놓은 뒤 몽둥이 모양으로 우뚝 서 있는 녀석을 바라보면 정말 난처할 만큼 절망스럽지만 금세 정수리에 풍성히 잎을 내놓은 채 히죽 웃으며 말한다, “적응완료!”.
그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얼마간 근무하게 되었다. ‘싱겁고 적응력이 좋은’ 움벨라타 고무나무처럼 그가 그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며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화분에 리본을 감는다. 나름 선물이니까.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힌 리본, GUCCI.
그의 집과 우리 집 중간에서 만난다. 연분홍 보자기에 싸인 것을 들고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오른손으로 작은 화분을 움켜쥔 채 나도 그를 향해 손을 흔든다. 나는 책을 받아 품에 안고, 그는 화분을 받아 손에 쥐며 내 안색을 살핀다. 책이 무거우니 들어주마고 나를 따라오기에 손사래를 치며 돌아가라 했지만, 저기 까지만, 하며 따라온다.
내가 앞서 걸으며 말한다.
“날씨가 따뜻하다.”
“그러게요. 낮에 빛이 있을 땐 진짜 따뜻하더라고요.”
일상의 흘려들어도 좋을 말로 시작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그가 말한다.
“어디서건 똑같을 거예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거고, 어디서건 외로울 거고.”
그의 말을 내 마음에 받아 적은 후 어렵게 되읽는다. 외로움이란 단어가 섞인 말은, 그 말은 언제나 다루기 어렵다.
“있잖아, 나도 있어. 나도 어딘가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 있어.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 구멍에 바람이 드나드는데 견디기 어려웠어. 혹시나 해서 이것, 저것 매달려 보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했었는데 소용없었어. 사랑이나 사람으로 구멍을 메울 수 있다고 믿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결국, 그 구멍은 계속 뚫린 채 메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결국, 외롭다는 말이야. 언젠간 외로워지거나 외롭거나 그 둘 중 하나야.”
우리 집 쪽문에 다다랐을 때 그의 옆얼굴에 어린 표정을 미미하게 읽는다. 그의 귀 부근 볼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다. 나는 그의 흰 볼에 막 돋은 소름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언제 사라지는지 모른 채 짐작하려 애쓴다. 잠시 그러다 나에게는 없는 ‘표식’이라 알 수 없겠다 싶어 포기한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친숙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친숙하다는 것이 잘 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귀 부근, 광대가 솟아오르기 직전의 영역에 돋은 소름처럼.
많은 것을 공유하는 사이가 낯선 사이보다 못할 때가 있다. 서로 경계가 무뎌진 후 선을 지키기 어렵고 그것을 친함으로 무마하기엔 서로에게 남기는 흔적이 곱지 못하다. 차라리 어림짐작 되지 않는 영역이 상대에게 혹은 나에게 일정 부분 있어야 한다. 감정의 파도가 덮칠 때 숨어들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그를 보내고 뒤돌아보니 멀어지는 그의 모습 뒤로 1월 아파트 화단에 나무들이 잎을 달고 계절감 없이 어정쩡 히 서 있다. 그중 단단하고 반짝이는 잎의 동백이 묻는다.
“눈은 오지 않나요?”
“응. 눈은 오지 않아, 적어도 오늘은. 그리고 너는 언젠간 꽃이 피거나 꽃이 피었거나 그 둘 중 하나야.” 나는 조용히 답한다.
완만히 동그란 모양으로 이발을 하고 눈을 뒤집어쓴 채 진분홍 핀을 온 가득 꽂은 동백의 모습은 2월에나 가능하지.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고 아직은 1월이다.
동백나무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조용히 나를 향해 뱉어낸다. 나의 마음에 뚫린 구멍을 정확히 관통한 후 어디론가 흩어진다.
결국 인간은 언젠간 외로워지거나 외롭거나 그 둘 중 하나다.